[얼굴-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 “인권을 위해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 통일은 이뤄진다”

입력 2015-03-28 02:24
베를린 장벽 붕괴를 이끌어낸 ‘평화기도회’ 주도자, 보네베르거 목사가 26일 경기도 용인 수지구 단국대학교에서 한국 방문에 대한 소감을 말하고 있다.용인=허란 인턴기자
구 동독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스교회 전경. 교회 예배당에서는 1982∼89년 매주 월요일 오후 6시에 평화기도회를 개최했다. 기도회를 마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비폭력 시위를 하고 있다(왼쪽부터). 국민일보DB
가지런히 기른 콧수염과 턱수염은 머리 색깔과 잘 어울렸다. 단단한 몸매에 땅땅한 키. 10년은 넘게 쓴 것처럼 보이는 빛바랜 금테 안경. 그 안경 너머로 웃음이 번질 때면 자글자글한 주름이 부챗살처럼 펴졌다. 한국 나이로는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였지만 자연스러웠다. 옷차림도 가벼워 청바지에 군청색 자켓이 몸에 꼭 맞았다. 외모만 봐서는 이 남성이 근엄한 목회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71세의 독일인 목회자. 스스로 자유인이자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이 사람. 1989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도화선이 됐던 구 동독 ‘평화기도회’의 주역,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가 26일 전격 방한했다. 그는 독일 통일 직후 뇌졸중 쇼크로 15년 동안 말을 못하는 ‘실어(失語)’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국내 스케줄이 줄줄이 잡힌 탓에 인터뷰 시간은 단 15분에 불과했지만 그의 한 마디는 천금같았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단국대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은 첫 방문이라 들었다.

“사실 아시아도 이번이 처음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한생명살리기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15명의 회원들이 꽃다발과 플랜카드를 들고 환영해주었다. 영락교회 성도들을 주축으로 2년 전부터 통일을 위해 기도해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 방한은 개인적으로는 큰 결정이었다. 26년 전까지 전 세계 분단국가는 동서독과 남북한이었다. 지금은 남북한만 남게 됐다. 먼저 통일을 이룬 독일 시민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짧은 일정이지만 많이 배우고 싶다.”

-한국은 올해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았다. 이를 기점으로 기독교계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한국’ ‘복음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분단 상태가 오래가면 안 된다. 분단은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 아시아 등 주변국과도 연결돼 있다. 평화가 아닌 긴장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분단 7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은 통일을 넘어 세계 평화를 위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구 동독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에서 기도운동을 주도했던 당사자로서 한국교회의 통일 기도운동에 대해 조언해달라.

“기도 운동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독일과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는 것을 우선 말하고 싶다. 이는 독일의 사례를 그대로 한국에 대입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구 동독의 기도운동은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유럽의 질서가 평화로 확립되기를 기원했다. 무엇보다 인권이 보장되기를 바랬다. 통일은 동독과 서독이 서로 교류하면서 물꼬를 텄다. 이후 양국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통일만을 위해서는 안 된다. 남북한의 인권이 증진되도록,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통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독일은 49년 9월 독일연방공화국(서독), 10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나뉘어진 이후 40년 간 분단 상태였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구소련은 ‘낡은’ 사회주의 국가의 단면을 드러냈다. 무능과 부패, 자본주의적 병리 현상이 혼합돼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내걸고 ‘페레스트로이카’와 경제개방을 추진했고 이 여파로 동서간 긴장이 완화됐다. 동유럽에서는 사회주의 동맹이 무너지며 대규모 시위와 저항, 자유선거와 연립 정부 수립의 단계를 거치는 등 대변혁을 경험했다.

대규모 시위는 동독에도 나타났다. 82년 가을 라이프치히 광장에서는 50여명의 청년들이 동서독에 핵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촛불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경찰이 체포하려고 하자 교회당으로 피신했다. 성니콜라이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열렸던 ‘평화기도회’는 이렇게 시작했다. 당시 보네베르거 목사는 동독 내 여러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평화기도회를 주창하며 기도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성니콜라이교회의 담임이었던 파레 C 퓨러 목사(지난해 별세)는 보네베르거 목사와 함께 월요기도회를 주도했다. 기도회는 예배와 함께 다양한 정보가 교환됐고 성명서가 발표됐다.

보네베르거 목사는 86년부터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 주관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시 동독 정부는 평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들이 계속 교회로 모이자 탄압을 시작했다. 인권·노동단체의 출입을 통제했고 비밀경찰이 교회 안에 상주하면서 기도회를 감시했다. 보네베르거 목사는 협박까지 받으며 88년 평화기도회 주관 목사직에서 해임됐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굴하지 않고 자신이 시무하던 루카스교회 목사관 안에서 인권단체의 권익보호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동독 정부는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 기도회와 자유·통일을 향한 물결을 막지 못했다. 89년 9월 25일, 보네베르거 목사는 성니콜라이교회에서 라이프찌히 평화시위의 기폭제가 됐던 ‘비폭력’을 주제로 설교했다. 산상수훈(마 5∼7)의 팔복은 성경 본문이었다. 이 메시지는 시민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선사했고 이후 10월 9일 평화기도회에 8000명이 참가하며 촛불을 들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89년 9월 25일 산상수훈으로 설교했다. ‘팔복’을 본문으로 했다.

“팔복은 산상수훈의 가장 핵심 메시지이다. 불안과 불확실 속에 있던 성도들과 시민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산상수훈은 복음 그 자체다. 산상수훈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으로 가득하다. 다시 설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또 산상수훈을 선포할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통일을 위한 기도뿐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실천적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 한국 상황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딱 말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적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과 환경을 사랑해보자.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나는 검소하게 살려고 하며 현재의 삶에 자족한다.”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

“89년 10월 30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15년간 말을 못하는 실어증에 걸렸었다. 말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처럼 다시 연습하고 언어를 배웠다. 이전에 내가 구사했던 독일어 방언이나 외국어를 지금은 하지 못한다.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말할 수 있었던 단어는 모두 상실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웃음). 나는 이 상태로 만족한다.”



그는 27일 서울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피스코리아 국제심포지엄에서 ‘독일통일과 교회 역할’에 대해 발제했다. 30일까지 머물면서 한국교회와 통일 관련 단체 지도자 초청 기도회, 주일예배 등에 참석해 설교한다. 29일은 영락교회, 30일 여의도순복음교회 등을 방문한다.

용인=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