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소극장을 운영하는 40대 김모(여)씨에게 올봄은 '상실의 계절'이다. 최근 건물주가 찾아와 "가을까지 나가라"고 통보했다. 건물을 임차한 지 올해로 5년이 됐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임차권을 5년까지만 보호해준다. 가을이 되면 건물주 요구대로 극장을 빼야 한다. 그에겐 배로 올리는 임차료를 낼 여력이 없다.
김씨는 2010년 가을 대학로에 터를 잡았다. 준공 승인도 받기 전인 건물의 지하 1층을 대출받은 돈으로 어렵게 빌렸다. 보증금 2000만원에 월 142만원이었다. 30평 남짓한 공간에 조명기구를 달고 객석을 만들었다. 돈을 아끼려고 설비 대부분을 직접 설치했다. 지인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러고도 인테리어 비용만 9000만원이 들었다. 텅 빈 지하공간이 극장 구실을 하기까진 1년이 넘게 걸렸다. 그로부터 8개월이 더 지나서야 첫 연극을 올릴 수 있었다. 수입 없이 월세만 2년 동안 나갔다.
극장은 큰 수익을 내지 못했지만 다양한 문화공연을 올리는 곳으로 유명세를 탔다. 올해부터는 공연예술뿐 아니라 한국적 색채를 담은 공예예술 프로젝트로 활동 영역을 넓힐 계획이었다. 그러나 야심찬 꿈은 건물주의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났다.
대학로는 예술인, 특히 연극인들에게 문화와 낭만의 공간이었다. 이곳이 언제부턴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상권으로 변질됐다. 방아쇠는 엉뚱하게도 문화지구 지정이다. 서울시는 2004년 혜화로터리와 이화동로터리 사이 1.5㎞ 구간을 문화지구로 정했다.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지구는 역사와 문화자원을 관리·보호하고 문화환경 조성을 도모하려고 지정하는 구역이다.
문화지구 지정은 당초 목적과 반대로 대학로 소극장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대학과 기업들이 앞다퉈 대학로로 진출하면서 땅값·임대료 상승을 부채질했다. 문화지구 지정에 따른 혜택은 예술인이 아닌 건물주에게 돌아갔다. 대학들은 공간을 차지하고 대관업 등을 하고 있다. 기업은 영화관·식당·쇼핑몰이 한데 모인 멀티플렉스 등 상업시설을 세웠다. 문화지구에서 ‘문화’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건물주 한마디에 문을 닫는 소극장은 수없이 목격된다.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건물주들은 “딸이 쓴다”거나 “아들이 들어온다”는 말로 터를 잡은 예술인들을 밀어낸다. 공간이 비면 3개월쯤 공실로 방치한다. 그러고는 임대료를 배로 올려 다른 세입자를 받는 식이다.
혜화동 주민센터 인근의 한 소극장은 건물주가 바뀐 지 1년도 안돼서 쫓겨났다. 새 건물주는 “임대한 지 5년이 됐으니 이제 그만 나가 달라”고 했다. 자리를 잡은 지 막 5년을 넘긴 소극장은 그렇게 쫓겨났다. 극장에 투자한 돈이 1억원을 넘었지만 나올 때 손에 남은 것은 무대를 밝히던 조명기기 몇 개가 전부였다. 대학로에 둥지를 튼 소극장들은 이렇게 5년마다 거의 모든 것을 잃는다.
김씨는 “비워진 지 3개월 만에 다른 소극장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극장 시설 대부분이 남아 있으니 초기 비용은 덜 든다. 하지만 그만큼 임차료는 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공연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문화·창작공간이 상업시설처럼 임차권을 5년만 보장을 받는 건 문화예술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때 200여개에 달하던 대학로 일대 소극장은 현재 130여개로 줄었다. 2012년 배우세상소극장과 정보소극장의 주인이 바뀌었고, 지난 1월 상상아트홀과 김동수 플레이하우스가 폐관했다. 최근에만 대학로 소극장 40여개가 임대시장에 나왔다고 한다.
28년 역사의 대학로극장도 치솟는 임대료에 최근 폐관 위기를 맞았다. 2004년 월 150만원 정도였던 이 극장 임대료는 10년 만에 340만원이 됐다. 건물주는 100만원을 더 올려 달라고 요구한 상태다. 정재진 대학로극장 대표는 “우리 극장에서 1990년 공연한 ‘불 좀 꺼주세요’가 94년 서울시의 ‘정도 600주년 기념사업’으로 영화 ‘서편제’와 함께 400년 후 후손들이 볼 수 있는 타임캡슐에 담겨 남산 한옥마을에 수장됐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작품 대신 돈 되는 작품만 무대에 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현재 많은 소극장이 다른 곳으로의 이전을 꿈꾸고 있다. 한국소극장협회는 극장 20∼30개가 문화지구든 연극지구든 자신들을 받아줄 지방자치단체를 찾고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자신의 극장도 이들 소극장처럼 될까 두렵다. 건물주와 협상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월세를 배로 올리고 남아 있거나 그대로 쫓겨나거나.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기획] 대학로의 역설… 문화지구 지정 후 사라지는 문화공간 소극장들 “월세 더 내거나, 건물 비우거나”
입력 2015-03-28 02:48 수정 2015-03-28 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