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도시를 살리다] 서울 한복판 ‘열정의 섬’… 청춘은 골목을 살리고, 기존 상인은 아우성

입력 2015-03-28 02:48
25일 오후 1시 반쯤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 옛 인쇄소 골목(백범로87길)인 ‘열정도’ 초입에서 바라본 풍경. 인쇄소 건물 등을 개조해 영업 중인 식당들 앞으로 젊은이들이 지나가고 있다. 청년들이 일군 이 골목상권에는 기대감과 기존 상인들의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다.서영희 기자
25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 옛 인쇄소 골목(백범로87길)으로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뒤편으로 24∼39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 단지가 진군해온 군대처럼 동네를 포위하고 있다. 파노라마 방식으로 촬영해 길이 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곧은 십자(+) 형태의 사거리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길이 '열정도' 중심부다.


어디론가 통하는 길처럼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의 한 골목은 200m쯤 곧게 뻗어 있었다. 좌우로 낮은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을 감싸듯 앞뒤로 절벽 같은 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이 웅장하게 서 있다. 이 골목은 ‘고층빌딩의 파도’ 앞에 외롭게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골목길 한복판에 서면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백범로87길. 이 골목의 도로명 주소다. 한때 인쇄소들이 다닥다닥 붙어 쉴 새 없이 기계음을 내던 이곳은 10년 전쯤부터 활기를 잃었다. 밀물에 쓸린 모래처럼 인쇄소들이 빠져나갔다. 당장 추진될 것 같던 민간 개발사업까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좌초하면서 동네는 시들었다.

연고도 없는 청년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열정도’(열정의 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장사를 시작한 건 지난해 말부터였다. “지난해 9월이나 10월쯤 오토바이를 타고 저 건너편 고가를 쭉 넘어가고 있는데 신기한 동네가 하나 보이더라고요. 주변은 아파트로 쫙 둘러싸여 있는데 그 안쪽은 푹 꺼진 동네였어요. 대체 뭐하는 데인가 하고 방향을 꺾어서 이쪽으로 들어왔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김연석(34) 청년장사꾼 공동대표는 지난 24일 닭튀김 전문점 ‘치킨사우나’에 앉아 지금의 열정도를 만난 계기를 풀어냈다. 열정도 초입의 치킨사우나는 청년창업 단체 청년장사꾼이 아무것도 없던 이 골목에 차린 음식점 6곳 중 하나다. 김 대표는 “자본금이 넉넉하지 않은 청년들이다 보니 기존 상권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대신 이곳에 직접 새로운 상권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25일 치킨, 감자튀김, 삼겹살, 백반, 철판구이를 각각 주력으로 하는 식당과 술집이 한꺼번에 문을 열었다. 한두 가게로는 상권을 만들기는커녕 삭막한 환경에 압도당할 게 뻔했다. 가게는 기존 상가를 임대해 젊은 사람 취향에 맞게 꾸몄다. 대부분 인쇄소, 창고, 채소가게, 미용실처럼 식당과 무관한 전력에 외관도 제각각인 건물들은 그 이유로 개성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찾는 사람이 늘고 가게는 석 달 만에 자리를 잡았다. 청년장사꾼은 최근 상가 하나를 추가로 임대했다.

새로운 풍경엔 가속도가 붙고 있다. 다른 청년 상인들이 가세하면서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커피숍, 케이크 전문점, 맥줏집, 꼬치구이집, 북카페, 공방, 옷가게 등이 이미 문을 열었거나 개업을 준비 중이었다. 청년들과 공인중개사가 짝을 이뤄 건물을 보러 다니는 모습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 골목은 변화의 몸부림 안쪽으로 복잡한 속사정을 끌어안고 있다. 제법 상권이 형성될 기미가 짙어지자 임대료가 들썩이고 있다. 식당끼리 메뉴가 중복되면서 ‘손님 나눠먹기’도 불가피해졌다. 오래전부터 세 들어 장사해온 기존 영세상인들은 이 상황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식당은 최근 건물주의 요구로 보증금과 월세를 올려주고 대신 직원을 해고했다.

인쇄소 골목에서

몇곳 남지 않은 인쇄소에서 '절거덕 절거덕' 기계 소리가 새어나왔다. 육중한 인쇄기가 입을 열었다 닫듯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쇄기 상단이 위로 들리면 하얀 종이가 혓바닥처럼 드러났다.

"한창때는 이 일대 인쇄소가 한 1000개는 됐어요. 대부분 소규모였죠. 지금은 15∼20개밖에 안 남은 것 같아요. 우리도 원래 없어져야 했는데 재개발이 안 되는 바람에 남아 있는 거죠."

백범로87길에서 200평(661㎡) 규모의 인쇄소를 운영하는 장형권(39) 유니크기획인쇄 대표가 설명했다. 20년간 인쇄업을 해온 그는 "예전에도 동네가 워낙 위성도시 같아서 이 안쪽에 인쇄소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잘 몰랐다"고 했다. 청년 상인들은 인쇄소 골목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열정도' 상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합류하는 가게들

새로운 상가는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백범로87길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나가는 자리에는 꽃 장식과 케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가 문을 열 채비를 하고 있었다. 기와지붕으로 덮인 단층 한옥건물 안에서 50대 인부가 내부를 하얗게 칠하고 있었다.

백범로87길과 평행하게 뻗은 90라길 쪽으로도 아직 간판이 붙지 않은 공방과 맥줏집 '붐박스', 꼬치구이집 '술에꼬치다' 등이 장사를 시작했거나 준비를 거의 끝낸 상태였다. '술에꼬치다' 안에선 젊은 여성 2명이 묵직한 DSLR카메라로 가게 홍보에 쓰려는 듯 각종 꼬치를 촬영하고 있었다. 사장 이영주(36)씨는 "열정도 얘기를 듣고 함께하면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가게를 냈다"고 했다.

백범로87길과 90라길을 가늘게 잇는 길이 35m, 폭 2m 정도의 좁고 그늘진 골목에도 가게들이 하나둘 터를 잡고 있다. 중간쯤에는 지번주소(원효로1가 43번지)에서 상호를 차용한 옷가게 'ALLEY43'이 개업을 앞두고 있었다. 쇼윈도 조명으로 골목을 유일하게 밝힌 이 가게는 여성복과 아동복, 직접 만든 액세서리와 가방을 취급하는 매장이었다. 상품은 인터넷으로도 판다. 친구와 동업하는 박희진(34)씨는 "열정도보다 조금 먼저 계약했는데 인테리어가 얼마 전에 끝났다. 열정도 덕분인진 몰라도 장사하는 사람끼리 똘똘 뭉쳐서 하는 게 있다"고 했다. 맞은편 3층짜리 건물은 이태원과 삼청동의 맛집으로 알려진 한식주점 '모던식당'이 들어올 자리로 예약돼 있었다.

한 건물주의 사정

2, 3층짜리 건물들이 협곡 같은 풍경을 빚어내는 이 샛길은 과거에 왁자지껄한 먹자골목이었다. 끼니때만 되면 인쇄업자와 기계공장 근로자가 몰려와 식당마다 빈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46년째 이곳에서 일한다는 남성(68)은 "이 골목이 옛날에 다 밥집이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동굴처럼 컴컴한 건물 1층의 얇은 미닫이문 바깥에는 순두부백반, 콩나물해장국, 닭볶음탕, 버섯불고기백반, 솥뚜껑삼겹살, 해장라면 따위가 적혀 있었다.

그 앞에서 만난 40대 여성 공인중개사는 "이 건물도 할머니가 (임대로) 내놓으셨는데 식당 한다는 사람도 있고 카페나 옷가게 한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곧 단발에 스카프를 두른 30대 후반 정도의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개인 사무실로 쓸 공간을 찾고 있었다.

2층에서는 건물주인 나이 많은 여성이 녹색 고무장갑을 끼고 곰팡이와 함께 눌어붙은 벽면 페인트를 긁어내고 있었다. 팔순이 다 됐다는 그는 10년 만에 이 건물에 왔다고 했다. "개발된다고 하도 그래서 이걸 10년을 문도 안 열어놓고 놔뒀잖아. 저기 있던 달력을 보니까 2004년인 거야. 처음에 문을 여니까 재채기가 얼마나 나던지. 이거 관리하던 아저씨(남편)는 돌아가셨는데 그 흔적이 여기 있는 거야. 나는 문만 열면 가슴이 막 두근두근해가지고 생전 여기를 안 왔던 거야."

그를 다시 불러온 건 장사할 곳을 찾는 청년들이었다. "자꾸 계약하자더라고. 이 골목이 예전엔 으스스하더니 지금은 저쪽에 고깃집인가본데 옛날 여기 1층처럼 아주 바글바글해."

불안한 기존 상인들

기존 상인들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다. 같은 자리에서 10년 가까이 장사했다는 한 식당 주인 부부는 열정도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죽겠다"는 말부터 했다. "우리한테 도움이 하나도 안 돼요. 청년창업해서 여기 활성된 거 하나도 없어요. 장사는 안 되는데 임대료만 올려놓고. 이 사람들이 하다못해 김치찌개까지 해요. 거기 가서 한번 보세요."

이 부부는 지난달 건물주와 재계약을 하면서 보증금 1500만원, 월세 130만원이었던 임대료를 각각 2500만원, 150만원으로 올렸다. 남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올려주고 낮에 일하던 아줌마 하나를 잘랐다. 우리도 살아야 되니까"라고 말했다. 다른 식당 주인도 재계약 때 임대료가 크게 오를까 걱정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은 다 그 총각들한테로 몰려간다. 우리한테는 안 온다"고 했다.

전에 없던 권리금도 붙기 시작했다. 한 상인은 "부동산에서 우리 가게에 권리금 3000만원이 붙었다며 넘기라고 하더라. 안되겠다고 했더니 더 주겠다면서 자꾸 찾아온다"고 전했다. 그는 "누가 월세를 지금보다 많이 준다고 하면 주인이 나한테 나가라고 하지 않겠느냐"며 우려했다. "여기를 떠나면 어디 가서 다시 장사를 시작하느냐"며 막막해 하는 상인도 적지 않았다.

청년장사꾼은 이웃 상인과 상생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청년 상인들의 열정이 기존 영세 상인들의 설자리를 위협하는 역설을 낳고 있다. 열정도는 하나의 상권을 만드는 문제를 넘어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쟁자들이 상생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인지 모른다.

글=강창욱 기자, 사진=서영희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