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48) 역사 주관자는 하나님-보스니아·알바니아 등 발칸반도를 지나다

입력 2015-03-28 02:09
내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보스니아 아파트의 모습.

스위스에서 리히텐슈타인을 거쳐 오스트리아, 다시 발칸반도 국가들을 지나는 여정은 참으로 지난했다. 추위에 야영을 해가며 무리했더니 하루가 다르게 왼쪽 무릎이 저려 왔다. 그럼에도 환희가 있었다. 매순간 감사로 넘쳤다. 나의 작음을 알고 하나님의 크심을 아는 믿음으로 매일 밤마다 광야의 은혜를 묵상했다.

그러나 발칸반도를 다니는 내내 나는 그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목도하면서 마음이 저려 왔다. 역사상 최악의 참상 중의 하나로 기억되는 보스니아 내전을 비롯해 유고슬라비아, 코소보,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내전까지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일개 민초가 헤아리기란 참 어렵고 비통한 일이다. 왜 전쟁은 탐욕스런 지도자들이 일으키고 수습할 때는 힘없는 민중의 피눈물로 덮어야 하는 걸까.

2012년 4월 보스니아 공원묘지를 갔을 때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웃는 모습이 비석에 아로새겨 있었다. 아마도 한 동네 청년들이었던 모양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된 것이 1992년 한날의 아픔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청년들의 말 없는 미소는 큰 외침이 되어 들려왔다. 절대로, 절대로 인간에게 생명에 대한 심판은 있을 수 없다고….

알바니아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유럽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슬람 문화가 넓게 퍼져 있었으며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기독교와의 관계도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중동 문화권에서 익숙했던 무슬림 음식도 간혹 접할 수 있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음식이다. 식도락의 즐거움을 통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의미 있게 살펴볼 수 있다.

알바니아 북쪽 코플리크에 도착해서 빵으로 간단히 허기를 달랬다. 몇몇 선교사들이 척박한 알바니아의 상황들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간의 무리로 쇠잔해진 몸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한동안 도시 외곽을 방황했다. 슬럼가는 치안이 그리 좋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의심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었다.

야영을 위해 주변을 살피던 중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미래 영어 선생님의 꿈을 키우는 열네 살 ‘신디’였다. 우리는 대문 앞에서 흥미롭게 대화하다 잠시 뒤 그녀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정신없이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의 숫자를 세어보곤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3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이었다. 아이들은 뜻밖의 이방인을 맞이해선 내내 살갑게 놀아주었다.

신디는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소개해 주었고, 모두가 둘러앉은 가운데 그들이 즐기는 놀이에 도취되어 신나게 참여했다. 저녁 식사가 나왔고, 어느새 나는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신디의 아버지는 내 형편을 보고선 따로 방을 마련해 주었다. 이 모든 상황이 바로 조우한 신디를 만나고서부터다. 그간 만났던 발칸반도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일련의 사건들의 개연성은 무척 희박한 확률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다.

거저 받았으니 나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저 주어야 했다. 나는 지금껏 체온을 지켜준 따뜻한 겨울 코트와 선물 받은 스웨터 등 옷가지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겨울 유럽의 끝에서 다시 여름 아프리카를 들어가는 마음에는 내 것은 없고 하나님의 것만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미래를 준비하는 첫걸음이어야 한다. 발칸반도를 지날 때 머릿속에 가득했던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답을 얻을 순 없었다. 하지만 알바니아의 한 소녀를 만나면서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어리석음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내 삶의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만 기록되고 싶은 소망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문종성 (작가·vision-mat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