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직면한 H권사는 늠름했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6개월가량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에는 하릴없이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았지만 그 이상의 치료는 거부했다. 몇 백만원을 호가하는 아주 좋은 신약이 있으니 써 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마저 사절했다. 기도원에 많이 다녔고 새벽예배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예상 기한을 겨우 두 달 더 넘겼지만, 전신에 퍼진 암세포가 단말마적 기승을 부리던 말년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었다. 죽기 하루 전날 문병을 갔을 때에도 만신창이 몸으로 미소 지으며 애써 승리의 V자까지 보였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파괴될지언정 결코 패배당하지 않는다”는 명언은 순전히 H권사를 두고 한 말 같았다.
한국사회에서 죽음은 점점 더 남의 일로 치부되고 있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임종을 맞는 이는 드물다. 중병에 걸린 직후부터 병원을 전전하다 환자나 가족들의 결단이 아닌 의료진의 결정에 따라 임종 과정이 진행된다. 심지어 죽은 후의 장례식조차 장의사가 처리해주니 유가족은 죽음 체험의 당사자가 아닌 참여자처럼 되고 만다.
한국인들은 유독 목숨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말기암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거나 차분히 인생을 정리하는 데 쓰는 이는 흔치 않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해서든 더 살아보려고 병원 처방이나 민간요법을 불문하고 모든 수단을 강구해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기계에 의지해 인공연명 상태에 들어가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억지로 버티다 눈을 감고 만다.
왜 이토록 삶에 집착하는 걸까. 우리의 의식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유교적 가치관 때문이라는 보고가 있다. 한 제자가 공자에게 죽음에 관해 묻자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未知生 焉知死)”라고 대답했다. 사후생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죽음은 모든 것을 끝장내는 공포 중의 공포가 되고, 급기야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발버둥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삶에 대한 유별난 집착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오늘날 우리는 천국과 부활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모습은 지나치게 현세적이다. 크리스천들의 명예와 권세와 부귀에 대한 애착은 일반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하지 않다. 입만 열면 영생과 천국을 말하는 설교자들이 감투싸움에 뛰어드는 것도 기이하지만 이전투구까지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면 과연 저들에게 천국과 심판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있기라도 한지 의심이 든다. 이러한 현세 집착의 기저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숨겨져 있고, 그 모든 분투 역시 죽음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집(愛執)이 강할수록 다급한 것은 죽음교육이다. 죽음 앞에 옷깃을 여미고 나는 누구이며, 바르게 살아오기는 했는지, 사후 영생과 부활을 정말 믿기는 하는 것인지 근원적인 성찰과 학습이 필요하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그 옛날 로마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들에게 외친 말이다. 오늘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말라는 경고다. 어차피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부귀영화가 덧없을 뿐이다. 고난주간과 연이어 찾아올 부활절을 맞아 반드시 죽어야 할 인생임을 자각하고 다들 강도 높은 죽음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
김흥규 목사 (내리교회)
[시온의 소리-김흥규] 죽음교육
입력 2015-03-27 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