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어른들은 왜 태권도장을 다니지 않을까… ‘성인 태권도’ 현주소와 대안

입력 2015-03-27 02:30
경기도 고양시 일산 김재훈태권도장은 성인 중심의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국내 몇 안 되는 태권도장이다. 2년째 이 도장에서 수련 중인 한철수씨(46·사진)는 25일 “그동안 온갖 운동을 해왔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운동은 태권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고양=김태형 선임기자
영국인 존 데이비스(34·가운데)씨는 태권도에 매료돼 한국을 찾았지만 성인 대상 태권도 도장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수련 뒤 동료들과 함께한 데이비스씨는 태권도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영국인 존 데이비스(34·영어강사)씨가 한국에 온 것은 4년 전입니다. 동양의 신비로움에 매료됐고, 태권도 종주국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흥미를 끌었습니다. 170㎝가 채 안 되는 그는 사실 영국 남성치고는 키가 작아 호신술에 관심이 컸었죠. 하지만 그가 둥지를 튼 서울에서 태권도를 배울 도장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태권도 도장은 곳곳에 있었지만 그가 찾아간 도장에는 모두 어린이들뿐이었죠. 전국 1만2000여개의 태권도장에 청소년 이상 성인은 거의 없고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만 주로 수련한다는 사실이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왜 태권도장을 다니지 않을까

성인들이 태권도장을 가지 않는 이유는 ‘태권도는 아이들 운동’이라는 그릇된 사회적 인식 때문입니다. 사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태권도장에는 도장마다 성인부가 따로 있었습니다. 성인부는 어린이부와 달리 야간에 수련시간이 편성돼 있었고, 난이도 높은 발차기와 타 무술의 호신술까지 가르쳤습니다. 당시 산업화가 막 시작되면서 치안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기에 성인들도 자기 방어를 위해 호신술이 필요했던 것이죠. 게다가 태권도 유단자는 해외 진출 기회도 있어 성인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운동이었죠.

해외 사범 출신이기도 한 김철오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도 당시를 이같이 회상합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건강을 위해 수련한다기보다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킨다는 호신의 의미가 더 강했다고 볼 수 있죠. 성인들이 도복을 들고 다니며 태권도를 배우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던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태권도장은 좀 더 유치하기 쉬었던 어린이 관원으로 포커스를 맞추게 됩니다. 도장들은 과외공부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위해 기초 체력 향상과 놀이 위주로 지도하면서 쉽게 도장경영을 했다고 할 수 있죠. 심지어 인기 있는 농구와 축구도 도장에서 가르치면서 태권도장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도장 경영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태권도장은 어린이들만 가는 곳으로 인식이 됐죠. 남성들은 군대에서 태권도를 배우면서 다리 찢기 등으로 아픈 기억이 있어 제대 후에도 태권도장을 멀리하는 원인이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미국 유학 중 성인이 돼서 처음 태권도를 배웠다는 오성희 사범은 “청소년과 성인 수련생이 절반이 넘는 미국과 달리 어린이들만 수련하는 한국의 태권도장이 처음에는 무척 낯설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전혀 태권도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본격 성인부를 운영하던 도장은 서울 용산구의 아리랑도장과 경기도 일산 김재훈도장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전국에 40개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성인 태권도 보급에 뜻을 둔 몇몇 사범들과 대한태권도협회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성인 태권도 수련, 무엇이 좋아질까

과거 어른들이 태권도를 배운 주된 이유가 호신에 있었다면 지금은 성인병 예방과 심신 단련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학계에서는 지속적인 태권도수련이 현대인의 그릇된 식습관에서 기인한 비만,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등 각종 성인병 예방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어린이의 태권도수련도 근력, 심폐지구력, 유연성, 평형성 등 신체를 조화롭게 발달시키고, 뼈와 관절 및 근육조직의 발달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실제 태권도를 수년간 수련해온 성인들은 한결같이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일상에서 자신감이 충만해졌다고 증언합니다.

김재훈도장 성인부에서 2년간 수련해온 한철수(46·회사원)씨는 “등산, 축구, 족구 등 온갖 운동을 해봤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운동은 태권도밖에 없었다”면서 “태권도 수련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수련을 할수록 태권도 고수들의 깊이를 알아가는 묘미가 있다”며 “훗날 태권도 해외봉사를 떠나고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정신과의원 개업의인 나영석(44)씨는 태권도 4단입니다. 그는 “맨발에다 아무런 도구 없이 전신운동을 하는 태권도는 근육량을 키우고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 특효약”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생활에 활력소가 되고 자신의 동안 외모 비결이 태권도에 있다고 귀띔합니다.

오랫동안 ‘태권도 건강론’을 주창해온 류병관 용인대 태권도학과 교수는 “태권도는 639개의 근육들을 골고루 발달시켜 주는 건강 무도인 동시에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의 무도”라고 강조합니다.

음악과 태권도를 접목한 프로그램을 이수한 중년의 주부들에게서는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대한태권도협회가 최근 모 방송국과 함께 태권도 수련을 통한 10주간의 비만퇴치 프로그램을 운영한 결과 30㎏을 감량한 사례와 갱년기를 극복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인생이 달라졌다”고 고백한 사례도 있었죠.

태권도를 수련하는 성인들은 어린이들과 달리 ‘중독’이 돼 다년간 꾸준히 도장을 다닌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학원을 다니듯이 길어야 1∼2년을 수련하는 어린이들과는 달리 도장의 입장에서는 ‘평생 고객’이 되는 셈이죠.

성인 태권도,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성인들을 태권도장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기존 도장들이 새롭게 갖춰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인들이 건강유지를 위해 다니는 헬스장, 수영장 등 여타 경쟁 스포츠 시설과 비교해 현재의 어린이 대상 태권도장 시설은 정말 열악하죠.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은 성인 프로그램 개발입니다. 사실 지금의 도장들은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만 있을 뿐 성인 프로그램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르칠 콘텐츠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국내 사범들은 지난 40년간 어린이들만 가르쳐 왔으니까요.

성인들은 20∼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포함합니다. 연령대별 근력이 다른 데다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도 많아 조심스러운 프로그램 접목이 필요하지요. 기본 발차기라 해도 성인들은 어린이들의 그것과 달라야 마땅합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성인 콘텐츠 보급을 위해 일선 사범을 대상으로 1년 연수프로그램을 4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 보스턴에 본관을 두고 있는 김재훈 사범도 1년에 두 차례 한국에 와 수년째 미국 성인프로그램 40년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대한태권도협회 이종천 책임연구원은 26일 “위기에 빠진 일선 도장사범들의 성인 태권도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면서 “사범들이 먼저 변해야 성인 태권도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건강을 위해 가까운 태권도장을 한번 방문해 보실까요?

(영국에서 온 데이비스는 수소문 끝에 김재훈도장을 발견했고, 3년째 서울과 일산을 오가며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1년 전 힘들게 초단을 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외국인들은 저렇게 좋아하는데 우리 나라 성인들은 왜 태권도를 외면해 왔을까요?)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