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무식하다. 이름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랫동서는 대구 경북여고를 나온 재원이었다. 거울 옆에는 세라복을 입은 여고생의 사진이 붙었다. 어머니는 그 사진 보는 일을 괴로워했다. 그러나 우리 딸들에게 작은집 심부름을 시킬 때 꼭 그 사진을 보고 오라 하셨다. 갈망을 가지라는 것. 어머니 성공은 곧 숙모님이다. 더도 덜도 아닌 숙모같이 되라 하셨다. 성공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숙모님이 가진 것을 하나도 갖지 못했다. 학력 인물 인품…. 또 큰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딸이 여섯 아들이 하나였지만 숙모님은 아들이 여섯 딸이 하나였다. 치명적인 차이다. 거기다 숙부님은 국회의원까지 했으니 숙모님을 사모님이라 사람들은 불렀다.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높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딸 중에 동서보다 높은 딸을 만들기로 인생 개선안을 마련했다.
1955년 전쟁의 기미가 다 가시기 전 셋째 딸을 마산여고에 보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다시 넷째 딸을 마산여고에 입학시켰다. 졸업하고 모두 결혼해 버렸다. 포기하지 않았다. 다섯째 딸을 부산으로 보냈다. 마산은 터가 나쁘다는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 차부에서 어머니는 당부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여자로서 행복해라.” 어머니가 갖지 못한 것들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 대학 조교를 할 때 딸의 성공은 바로 옆에 있는 듯했다. 가능성의 시인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희망은 거기까지다.
어머니의 전 인생이었던 다섯째는 결혼 후 나락으로 떨어졌고 남편의 졸도로 중환자실에 오래 머물렀다. 그때 그 충격으로 몇 달 만에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여자 나오라면 그 딸이 걸어 나오겠다”는 충격의 말을 남겼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혀를 물고 불행을 견디었다. 박사를 하고 교수를 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봄은 다 살아오는 계절 아닌가. 봄이 되면 어머니가 이젠 늙어 고요한 딸을 보고 웃으실라나, 나의 봄 소견이다.
신달자(시인)
[살며 사랑하며-신달자] 봄과 어머니
입력 2015-03-27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