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비극적 전쟁이었다. 그런데 세계적 규모로 전개된 이례적이고 야심 찬 평화를 위한 기획이기도 했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유엔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평화 논의와 참여가 열정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다.
이것은 한국전쟁을 비극적인 전쟁의 과정으로만 기술할 게 아니라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고난의 과정으로 서술할 여지를 준다. 젊은 사회학자 김학재(39·독일 베를린자유대학 동아시아연구원 전임연구원)씨가 한국전쟁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했다.
“만일 한국전쟁 자체가 처음부터 특정한 형태의 전쟁임과 동시에 특정한 평화 기획들과 맞물려 그 자장 속에서 전개되고 종식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판문점 체제의 기원’은 여기서 출발한다. 독자는 물론 학계에서도 생소한 이 같은 조망은 한국전쟁에서 ‘한반도’나 ‘냉전’이라는 오래된 키워드를 ‘국제법’이나 ‘평화’로 교체할 때 비로소 얻어진다.
저자는 1950년 6·25 직후 유엔의 개입에서 1953년 7월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판문점 문제를 놓고 국제무대에서 전개된 기획과 논쟁, 움직임 등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의 전개와 종식 과정에서 남북 두 나라의 적대나 미소 양국의 냉전 대신 유엔을 통한 국제적 개입이라는 측면을 부각한다. 한국전쟁은 최초의 유엔전쟁이었다. 유엔 창설 이후 회원국들이 대규모 군사 개입을 한 첫 사례였고, 유엔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군사 개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평화를 위한 행동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유엔과 미국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결정들이 신속하게 이뤄졌다.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31일까지의 안보리 결정은 전례도 없고 이후 반복될 수도 없었던 매우 이례적인 결정들이었다. 이 국제적 개입을 고려하면 한국전쟁을 전쟁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화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게 가능해진다.
물론 국제적인 평화 기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이 겨우 도달한 휴전협정이란 “결코 안정적인 영구 평화를 창출하지 못한 실패 사례”였을 뿐이었다.
“판문점 체제는 중국의 개입 이후 부과된 정치적 압력 하에서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정치적 해결을 유예시킨 군사 정전 체제였다. 그리고 미국과 이승만의 협상의 산물로서, 한미 군사동맹 체제 아래에서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전시하려는 아이젠하워 근대화 정책의 대표 사례였다.”
저자는 판문점 체제가 단지 냉전과 군사적 전투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국제법과 국제기구, 여러 국가들의 기획과 협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53년의 정전협정에서 60여년이 지나도록 왜 우리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는가, 한반도는 왜 냉전이 끝난 이 시대에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이것이 국제문제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한국전쟁의 발발, 전개, 종식과 처리의 문제 모두에 국제기구와 강대국들이 개입하고 관여했으며, 다양한 분업과 하청 관계 속에서 해결되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남북한 정부와 사회는 이 국제문제와 대면해 해결할 능력을 키워 나갈 기회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판문점 체제에 내포된 국제성과 평화적 성격, 그리고 모순적이고 임시적인 특성 등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위험성을 직시하게 하는 한편, 판문점 체제 너머 평화의 출구를 찾아가는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준다.
저자는 “판문점 체제의 불안정성은 곧 작은 외적 안보 갈등 요소에도 한반도 전체가 늘 ‘예외 상태’에 처하게 되고 외부의 갈등이 곧 내부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기본 조건”이라며 “중미 경쟁 분위기 속에서 판문점 체제의 불안정성은 더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제기된 평화론이나 통일론이 얼마나 유효한지 재검토하고 새로운 상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남북 양자나 6자 구도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좀더 포괄적인 아시아 정치 협상의 장을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학재씨의 첫 단독 저서인 이 책은 6·25전쟁 연구서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거대 담론이다. 미시사 연구에만 매몰된 듯한 학계에 지적 자극을 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을 평화론과 국제학 위에 재배치한 발상과 역량이 놀랍다. 이 분야 권위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오랫동안 닫히고 막혀 왔던 지식과 사유의 전환 문턱을 비로소 열어 제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판문점 체제, 한국전쟁이 남긴 실패한 평화 기획
입력 2015-03-27 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