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미끼 노예 노동·수당 없는 야근·의도적 무시 퇴사 유도… 분노한 청년들 “블랙기업 퇴출 운동”

입력 2015-03-26 02:42
4년제 대학 작곡과를 졸업한 A씨는 지난해 말 유명 공연기획사에 인턴으로 뽑혔다. 3개월 뒤 정규직 채용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일한 지 한 달 반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회의에서 배제되더니 기획한 공연 준비에서도 빠졌다. 점점 허드렛일이 늘었고 결국 정규직 채용 불가 통보를 받았다.

A씨는 “입사 때 회사 달력에 제 이름 이니셜을 붙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구성원으로 나를 받아주는구나 하고 감동했어요. 그런데 나갈 때쯤 달력을 자세히 보니 다른 이름 이니셜도 여기저기 붙어 있더군요. 한번도 듣지 못한 이름들이었는데 나처럼 3개월 있다 쫓겨난 사람들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블랙기업’이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고통스러운 취업전쟁을 치르는 청년층에게 일자리를 주는 척하며 비합리적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을 말한다. 청년노동조합 ‘청년유니온’은 25일 노동 상담과 블랙기업 제보, 설문조사, 심층면접 등을 통해 ‘한국형 블랙기업 지표’를 발표했다. 이들은 “제시한 4가지 지표(고용불안정, 일상적 착취, 직장 내 괴롭힘, 폐쇄적 소통구조)에 해당하면 블랙기업”이라며 “블랙기업 퇴출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청년유니온은 고용불안정을 ‘정규직 희망고문’(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블랙기업은 정규직 전환이라는 달콤한 말로 청년들을 유혹해 인턴·수습 등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채용한다. 청년노동자의 절박한 처지를 매개로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을 감내하도록 한다”고 했다.

장시간 노동은 가장 큰 문제로 꼽혔다. 그야말로 ‘노예의 삶’이라고 했다. 지상파 방송사의 외주업체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던 B씨는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주말 출근도 잦았다. 그런데 추가수당은 한 푼도 없었다. B씨는 “오전 녹화 끝나면 오후 녹화 이어지고 밤샘 촬영도 많았지만 일을 적게 하든 많이 하든 수당은 고정이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청년유니온이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 블랙기업 제보 사이트에 제보한 63명을 분석했더니 44명이 장시간 노동, 연장수당이나 시간외근무수당 미지급을 호소했다.

또 많은 비정규직 청년노동자가 의도적 배제와 무시를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블랙기업은 퇴사를 유도하기 위해 이를 전략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A씨는 공연기획사에서 퇴사하기 전부터 의도적으로 자신을 업무에서 배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밥도 혼자 먹게 됐다. B씨도 의도적인 업무 배제를 경험했다. 그는 “원래 새 장비가 들어오면 다른 회사 제품과 비교해보고 숙련도를 높이는 일을 하는데 계약기간이 끝날 때가 되니까 이런 일에서 완전히 제외당했다”고 말했다.

취업시장에서 약자인 청년들은 그냥 참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년노동자 199명의 설문조사에서 ‘상사와의 관계, 해고 등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탓에 문제제기를 못했다’는 응답(97명)이 가장 많았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