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옛 문인들의 그리움 밴 편지글 들추다

입력 2015-03-27 02:35

조선 후기 중국 지향을 탈피해 조선식의 ‘동국진체’를 개창한 서예가 원교 이광사는 수박씨를 즐겨 먹었다. 을해옥사에 연루돼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 간 그에게 여덟 살 막내딸이 정성껏 수박씨를 말려 보냈다. 아내는 옥사가 일어나자 자결해 올케의 손에 길러지던 어린 여식이었다.

“알고 말고 이 아비 그려 네 눈물이 줄줄 흐른 줄/ 소반마다 거둬 모으느라 손발이 수고롭고/ 아침마다 볕을 쬐랴 마음 썼겠지/ 어린 종이 훔쳐 먹을세라 자주 살피면서/ 갊아두곤 매양 올케에게 당부했으리.”

지난해까지만 해도 함께 쪼그리고 앉아 수박씨 까먹었던 그 아이. 이광사는 아비를 추억하며 수박씨를 말리던 딸의 종종거리는 모습이 선연해 편지를 쓰다 결국 울컥해진다.

편지가 사라진 시대다. 직장 동료는 물론 친구와 가족 사이의 근황도 이제는 즉각적인 ‘카톡’으로 주고받는다. 한문학자 강혜선 성신여대 교수가 옛 문인들이 한시로 쓴 편지글을 가려 엮은 뒤 해설을 썼다. 귀양 간 남편과 서울의 아내가, 숙부와 타향의 조카가, 서로 신임하는 임금과 신하가 주고받은 편지 등은 상대에게 도달하기까지 몇 달이 걸리기도 했던 시대라 그런지 그리움의 감정이 진하다.

하지만 그 때의 편지는 천리 거리를 무색케 하며 교육의 수단으로서도 제 역할을 했다. 이광사는 사대부집 여자아이가 익혀야 할 일상의 교육지침을 편지에 담아 딸에게 보냈다. ‘유배 편지’로 익히 알려진 정약용은 아비의 유배 이후 낙향해야 했던 자식들의 자포자기를 걱정했다. 그래서 “향리에 살면서 과수원이나 채소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타이르며 채소재배법을 편지로 자상하게 가르쳤다.

편지에 우정의 문장이 빠질 리 없다. 고려 후기 문인 이규보가 술병 난 친구에게 ‘새벽에 아황주 닷말을 단숨에 마시면 낫는다’고 쓴 편지는 장난기 속에 깊은 염려가 엿보인다. 시대가 가른 비극적 우정도 있다. 고려 말 이숭인은 개국에 반대했던 정몽주의 당이라 해서 유배되는데, 그의 절친한 벗이 조선 개국 공신 권근이다. 이숭인이 유배지에서 ‘서울이라 벗님네 편안히 지내시는가’라고 보낸 안부 편지에, 권근은 ‘문밖에는 누런 먼지가 만 길이라’며 능청을 떠는 것으로 아픈 마음을 감춘다.

한문을 알면 더욱 묘미를 느낄 것이다. 한시를 몰라도 걱정할 건 없다. 저자의 깔끔한 번역과 이면에 숨은 사연까지 담은 맛깔난 해설이 있어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준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