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별세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1959년 싱가포르가 영국 식민지에서 자치령으로 승격했던 시절부터 자치정부 총리를 맡았다. 이어 싱가포르가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초대 총리를 역임하며 1990년까지 싱가포르를 이끌었다.
그는 자치정부 시절을 포함해 총 31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부존자원 없는 작은 도시국가(692.7㎢·서울보다 약간 큰 규모)인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금융 및 물류 중심지로 탈바꿈시켜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부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9년 당시 400달러이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퇴직 당시인 1990년에는 1만2750달러로 올려놓았다. 지난해 싱가포르 1인당 GDP는 5만4000달러(약 6100만원)로 세계 8위, 아시아 1위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정치·사회적 안정을 달성한 점도 그의 리더십을 돋보이게 했다.
역사학자들은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아테네 이후 가장 놀라운 도시국가로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리 전 총리는 1923년 영국 식민지 시절 싱가포르에서 부유한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국 유학 후 195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1954년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했다. 1959년 35세 나이로 자치정부 총리를 맡았다.
그러나 리 전 총리는 그런 기적을 일구는 과정에서 권위적 통치를 중시했다. 싱가포르가 깨끗하고 범죄율 낮은 도시가 된 배경에는 무거운 벌금, 태형 등 강력한 처벌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아시아의 히틀러’ ‘온건한 독재자’로 불렸다. 그는 독재자라는 비난에 대해 개발이 뒤진 아시아가 서구를 따라잡으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웠다.
리 전 총리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만큼 다양한 어록을 남겼다. 특히 민주주의를 희생하면서까지 나라의 경제 기적을 일군 지도자인 그의 어록에는 배불리 먹기 위해서는 권위적 통치가 불가피하다는 정치관이 짙게 녹아 있다. 리 전 총리는 “나는 늘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었다” “여론조사를 해보라. 진정 국민의 바람이 무엇인가. 과연 원하는 기사를 쓸 권리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택과 의료, 일자리와 학교”라고 말할 정도로 언론의 자유를 경시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1990년 고촉통 전 총리에게 자리를 물려줬고, 2004년부터 그의 맏아들인 리셴룽(李顯龍·63)이 총리로 재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살던 집에 참배객들이 많이 찾아와 이웃에 방해가 될까봐 “죽거든 내 집을 허물라”는 유언을 남겨놓기도 했다.
그의 사망 이후 성장을 위해 사회를 엄격히 통제하는 ‘리콴유 스타일’의 싱가포르도 점차 변모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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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3-24 03:46 수정 2015-03-24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