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사기꾼들의 먹이사슬

입력 2015-03-23 02:34

먹이사슬이 따로 없다. 서민을 등치는 보이스피싱 조직, 그 조직을 속여 거액을 가로챈 20대 인출책 일당, 그들에게 외제차를 팔았다가 다시 훔쳐간 대포차 업자까지 먹고 먹히는 ‘동물의 왕국’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경남 거제에 사는 오모(22)씨는 지난달 중국 모바일 메신저 QQ를 통해 “현금 인출책이 돼 달라”는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의 제안을 받았다. 피싱으로 가로챈 돈을 은행에서 찾아오는 일이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하면 하루 출금 한도인 600만원까지만 찾을 수 있다. 이 조직은 은행 창구에서 직접 거액을 찾아올 계좌 명의자를 원했다.

오씨는 제안에 응하는 동시에 ‘작전’을 짰다. 친구 이모(23) 김모(23)씨를 끌어들여 함께 인출책이 됐다. 현금 인출에 활용토록 자신들의 계좌번호도 순순히 건넸다. 이 조직의 피싱 수법은 은행직원이나 검사를 사칭하는 거였다. “당신 명의 통장이 범죄에 이용됐다. 불러준 계좌로 돈을 입금해야 누명을 벗는다”며 피해자들에게 오씨 등의 계좌번호를 불러줬다.

중국 조직이 그렇게 가로챈 돈을 인출하는 날이었던 지난달 24일. 오씨 등은 대구의 한 은행에서 자신들의 계좌에 들어와 있던 2000만원을 찾았다. 앞서 다른 은행에서도 2680만원을 인출한 뒤였다. 은행을 나서자 중국 조직이 보낸 30대 조선족 A씨가 그 돈을 받으러 다가왔다. 오씨 일당은 A씨를 으슥한 곳에 데려가 용 문신을 보여주며 폭행하고 4680만원을 가로챘다. 중국 조직과는 QQ 메신저 연락을 끊었다.

오씨 등은 이 돈을 들고 대포차 업자를 찾아갔다. 인피니티 승용차 2대를 1500만원에 샀다. 그런데 1주일 만에 2대 모두 도난당했다. 보이스피싱 개입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이들은 “대포차 업자가 차에 위성항법장치(GPS)를 달아 판매한 뒤 다시 훔쳐간 것 같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전형적 대포차 사기 수법에 당한 듯하다”고 말했다.

오씨 일당보다 더 지능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을 농락한 이들도 있다. 최모(28) 정모(28)씨는 카카오톡 메신저로 “은행 현금카드를 만들어주면 대출해주겠다”는 스팸 메시지를 보내 급전이 필요한 사람을 모았다. 연락해오는 이들에게 “피싱 조직에 계좌번호와 현금카드를 넘겨주고, 그 계좌에 돈이 입금되면 우리가 먼저 인출해 갖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계좌당 현금카드를 2장씩 만든 뒤 ‘입금 알림 문자’가 오는 순간 먼저 돈을 인출해 달아났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사기 혐의로 오씨 등 7명을 구속하고 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2일 밝혔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