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패기로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 결과는 아주 좋았다. 소문이 나면서 공장 일거리가 점점 많아졌고 일손이 부족해 직원을 뽑고 시골에 있던 남동생도 불러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월급을 주고 결산을 하면 내 몫으로 돌아오는 액수가 봉급생활을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이렇게 2년6개월 정도 열심히 일하니 번 돈이 1000만원쯤 되는 것 같았다. 여기에 다시 1000만원 정도 빚을 내 2000만원을 공장에 재투자했다.
당시 사채 금리가 년 60%(월 5부)로 매우 높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사업이 아주 잘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장도 넓은 곳으로 옮겨 설비를 새로 하고 당시 막 나온 신형 차(브리샤)를 한 대 뽑았다. 연립주택도 한 채 샀다. 당시 23세 청년치곤 엄청나게 빠른 성공이었다. 내가 남보다 시간을 더 벌 수 있었던 부분은 징집면제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공장장 시절 일을 많이 해 늑막염으로 고생했고 병원에서도 보름 정도 입원했는데 퇴원 후 다시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중 입대 신체검사를 받아 면제 판정을 받았다.
승승가도를 달리는 중에 한 거래처 사장 사모님이 나를 보자더니 “자기의 사촌여동생과 선을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동안 거래하며 나를 유심히 살폈는데 참 건실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에 점수를 많이 주었노라고 했다. 이때 선을 보고 만나 1979년 결혼한 이가 바로 아내(이금순 권사)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눈이 아주 예쁘고 여성적인 모습에 매료돼 비교적 결혼을 일찍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집과 차를 다 가진 사장이란 점이 부각되어 점수를 땄을지는 몰라도 아내 입장에서는 기나긴 고생길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기도 했다.
아내는 결혼하자마자 사장 부인이 아니라 공장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식당 아줌마가 되어야 했다. 회사가 어렵거나 자금이 안 돌아가면 어떻게든 돈을 아껴 나를 도우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싼 부식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를 들쳐업고 먼 시장까지 다녀오곤 했다. 이런 아내의 헌신이 내겐 큰 힘이 되었고 회사가 성장해 오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사업에 그 어떤 것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고 나를 믿어주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꼭 필요한 배우자를 주신 것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회사 규모가 조금 커지면서 말썽부리는 거래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돈을 떼먹고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도어음을 주거나 아예 작정을 하고 사기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경험을 통해 처리해나갈 수 있지만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친 불경기나 사회적 이슈로 인해 타격을 받는 경우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사회가 뒤숭숭한 가운데 80년, 유류파동이 일어나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물가가 정신없이 뛰기 시작하는데 38.5%까지 올랐던 것으로 안다. 원자재값이 오르니 물건을 하청받아 납품하면 오히려 손해가 나는 일이 발생했다. 나는 사업이 잘된다고 신이 나서 공장을 넓히고 직원도 더 채용했는데 예상치 못한 큰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일거리도 신기할 정도로 딱 끊겼다. 매달 직원들 봉급에 사채이자며 나갈 돈은 많은데 수입이 없으니 정신이 아득했다. 사업 시작 후 처음 겪는 암담함이었다. 입에서 절로 “하나님!”이란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김무정 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상춘 (5) 신혼의 아내, 사업 번창에도 공장 식당서 헌신
입력 2015-03-24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