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성서 번역을 위해 목포로 가는 도중 해상사고를 당해 심해 속으로 잠겼다. 그의 아내와 4남매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에서 무정한 비보를 받았다. 남편과 아버지의 순직 소식이었다. 당시 12세였던 아펜젤러의 장남,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한국이 아버지를 내게서 앗아갔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품으셨다. 용감하고 가엾은 어머니 혼자 우리 4남매를 키웠다”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표현했다.
일본의 오사카상선회사 소속 배가 해상사고를 일으켰기에 그의 부인, 엘라 닷지 아펜젤러는 8년 동안 선박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그러나 보상금은 터무니 없었다. 엘라는 4남매를 키우기 위해 경제적인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장남인 헨리 닷지 아펜젤러도 신문배달을 했고, 방학이면 그의 삼촌 기계공장에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다 1911년 8월 13일 헨리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대를 이은 소명
아버지를 빼앗아간 한국이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뉴욕 빈민 소년과 함께 하는 레인스포드 캠프에 참가해 카운슬러로 봉사하게 된다. 거기서 친구 워즈워드 목사의 초청으로 주일 저녁예배에 참석하고 그의 가정을 방문하게 된다. 저녁예배를 마치고 워즈워드의 집에 가는 동안 공원길을 걷었던 그는 공원 풍경과 사람 등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였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모두를 위선자라 여기면서 자괴감에 빠진 상태에서 워즈워드의 집으로 향했다.
헨리는 워즈워드와 대화 중 목회보다는 사업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워즈워드는 진정한 기쁨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선택하라는 권면을 한다. 닷지는 순간 “마치 두 영원의 세계 사이에 매달려 있는 듯했고 결정을 해야만 될 것 같다”는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된다.
다음 날 캠프로 돌아온 그는 변해 있었다. 그가 보는 자연 환경과 모든 사람들은 환희로 가득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선친을 이어 한국에서 선교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이 자신의 길이고 옳은 길임을 자각했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드류신학교를 졸업, 1917년 미국 북감리교의 뉴욕 연회에서 선교사 안수를 받고 그의 ‘고향’ 한국으로 다시 파송됐다. 헨리는 누나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에 이어 1889년 11월 6일 서울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했고, 아펜젤러의 2차 안식년에 미국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프랭클린 마샬대학과 프린스턴, 드류신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학에서 문학 석사를 받았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는 점에서 한국 선교가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였는지 모른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 결혼했다. 배우자는 루스 노블(1894∼1986)로서 그녀의 아버지는 1892년 내한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자 배재학교 3대 교장, 평양지방 감리사로 1934년까지 한국을 섬겼던 윌리엄 노블 선교사였다. 헨리와 루스 노블 선교사는 결혼하여 자신들의 부모가 섬겼던 한국 땅을 대를 이어 섬기기로 작정하고 1917년 9월 4일, 내한했다.
한국의 교육 선교 상황
한편 아펜젤러의 죽음 이후 배재학교는 선교사들이 연합해 운영했다. 배재학교는 처음부터 고등교육과 대학 설립이 목표였기 때문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배재학교를 중심으로 남감리회의 한영서원, 북장로회의 경신학교를 연합, 1911년 9월 연합대학교(union college) 형태로 운영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장로교 내부에서 연합대학교의 위치를 평양과 서울 사이에 두고 갈등을 겪었다. 이에 장로교 선교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면서 결국 연합대학교 설립은 무산됐다. 하지만 배재학교의 대학 설립은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장로회와 감리회가 연합,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예수교대학교’를 설립해 그 취지를 이루었다.
배재 출신 중 신흥우는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모교의 교사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선교사들의 지지와 추천으로 1912년 제4대 교장이 되어 일제 치하에서 학교 발전에 고군분투한다. 일제의 감시 하에서도 학교 유지와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결과 ‘배재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
이 시기는 조선총독부가 학교 교육에 간섭해 기독교교육을 표적 삼아 종교 교육을 폐지하도록 하였고 이를 지키지 않을 시에는 학교를 정식으로 인가하지 않아 존폐의 문제가 대두되던 시절이었다. 결국 종교 교육은 학교 건물 밖에서 하는 방향으로 정하면서 총독부의 요구를 피해 갈 수 있었다.
‘배재학생기독교청년회’는 일제의 감시 밖에서 기독교 신앙이 민족을 구원하는 마지막 수단이 될 것으로 믿었다. 실제로 1919년 3·1운동에서 배재학생기독교청년회는 학생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옥고를 치렀다. 배재학교의 교장 신흥우는 3·1운동 직후 도미(渡美)했다가 7개월 만에 국내로 돌아왔다. 그러나 병에 걸린 자녀가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사유로 배재학교 교장직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학교가 불안정한 가운데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배재학교의 5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3·1운동의 여파로 배재학교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강화하자 경찰은 학생들을 연행, 주도자들을 색출하고 고문했다. 조선총독부는 헨리 닷지 아펜젤러에게 학교 운영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교장 취임 두 달 만에 인가 취소를 내려 교장직을 파면시켰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9) 대를 이은 선교
입력 2015-03-24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