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눈물, 마르지 않는 샘이 되다… 필리핀 가난한 자의 생명수 ‘철희의 우물’ 이야기

입력 2015-03-21 02:54
인천 가좌제일교회 임배운 안수집사·최연실 권사 부부는 2009년 9월 교통사고로 숨진 아들 철희(당시 27세)씨의 ‘1만명 전도’ 뜻에 따라 2010년 1월 필리핀에 ‘철희의 우물’을 설치했다. 이 우물로 가난한 이들이 식수난을 해결했다. 어머니 최 권사가 ‘철희의 우물’ 명패를 부여잡고 기도하는 모습. 가좌제일교회 제공
1만명 전도를 목표로 했던 고(故) 임철희씨와 그가 남긴 ‘개인기도제목’의 글(왼쪽). 오른쪽은 펌프식 우물에서 현지인들이 물을 긷는 모습.
지난 16일 인천 가좌제일교회에서 만난 ‘철희’씨 어머니 최연실 권사. 인천=전정희 선임기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딤후 2:22) 청년이었습니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잠 22:6)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야 아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2009년 9월 22일. 그 청년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스물일곱 청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혼절했습니다.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욥 30:31)라고 탄식하며 날을 지새웠습니다.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늘 웃는 얼굴에 손이 참 따뜻했습니다. 교인들과 악수를 나누며 복음과 구원, 천국을 이야기했지요. 그가 어느 날 강단에서 처음으로 고백합니다.

“다섯 살 장애아들을 잃은 적 있습니다. 지금도 그 사망진단서를 버리지 못하고 가방 속에 넣고 다닙니다.”

목사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으며 ‘생명을 살리는 물’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지금도 가난한 나라에선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이 갈급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어머니는 목사의 고백에 ‘쿵’ 하고 가슴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1만명 전도 열정의 청년, 죽어 선교하다

‘철희의 우물’.

철희는 그 ‘한 청년’의 이름입니다. 인천 가좌제일교회 청년부 임철희(당시 인하대4). 대기업 취업도 앞두고 있던 신앙심 좋은 ‘교회 오빠’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1만명을 전도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개인기도 제목’ 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만명의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책임질 선교사로, 교회 본당 건축에 재정적인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적 리더로 자랄 수 있게.’ 철희씨가 교통사고로 숨진 4개월 뒤인 2010년 1월. 철희씨는 그의 소원대로 ‘성령이 임하는 가운데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1시간가량 떨어진 레가스피(Legazpi)라는 곳에 ‘철희의 우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산 속에 거주하는 400여명 주민을 위한 펌프식 우물이 철희씨 부모의 헌금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부모가 철희씨의 기도제목이었던 1만명 전도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죠. 우물과 물 저장탱크는 인근 수녀원서 관리합니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아들 잃은 최 권사

철희씨는 엄마 최연실(52) 권사에게 ‘마마보이’였습니다. 185㎝ 키에 성악가 풍모의 체구였지요. 여동생 보배씨가 ‘터프’한 반면 철희씨는 살가웠다고 합니다. 최 권사는 “아들은 내게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큰 덩치가 싱크대 앞에서 요리하는 엄마 뒤로 와서 엄마 어깨에 턱을 대고 맛 평가를 할 때면 ‘아들 바보’ 되지 않을 엄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엄마는 철희씨를 낳던 무렵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열성에 천주교인이던 아버지(임배운·59·소방시설업)도 교회에 나갔습니다. 철희씨는 유치부에서 청년부까지 단 한 번도 교회 품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철희씨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공부도 열심이었습니다. 그 어렵다는 경기도 안산 동산고에 진학했고, 인하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가좌제일교회 청년부 활동을 통해 신앙의 깊이가 더욱 쌓여갔습니다. 하나님과 온라인상에 ‘비밀의 방’을 만들어 놓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섬김의 방향은 물과 같다. 위에서 아래로…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선 이 물과 같은 섬김이 필요하다. 중창이나 합창을 할 때도 옆사람의 소리에 맞추는 작은 섬김이 필요하다.’

‘요즘 헌신예배를 준비하면서 내가 이벤트 사업가처럼 느껴진다. 리더가 없어 내가 맡았다. 혼자 고민하다 보니 힘들다. 사탄이 이 틈을 파고들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한다.’

‘1만명을 섬기는 영과 육의 목자인 나를 생각하면 너무 너무 흐뭇하다 ^---------^.’ ‘네 예수님 힘듭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힘듭니다. 닮고 싶은데.’

‘내가 소유한 나쁜 습관들. 소유를 버리라 하셨는데. 음식에 대한 욕심,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하는 모습,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

‘감사해요 하나님 ♡ 저와 하나님은 비밀을 나누는 사이죠?’

“아들은 전도를 위해 축구팀을 만들었어요. 동네 형이었죠. 축구로 동네 친구, 교회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 아들을 볼 때마다 절로 찬송이 나오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전도 위해 축구팀 만든 아들

만 5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16일 가좌제일교회 ‘비전아카데미센터’ 친교실에서 만난 최 권사는 울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철희씨는 축구팀 형제들을 불러 집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최 권사는 그런 날이면 주방과 마당을 오가며 아들을 응원했습니다.

“요즘도 교회와 동네에서 아들 친구들을 보곤 해요.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요. 교회 친구들은 저의 직분을 부르지 않아요. ‘어머니’라고 불러요. 동네 친구들도 그러하고요.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그 어머니 호칭에 울고 말아요.”

최 권사는 아들 친구 얘기를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나던 날 철희씨는 꽃게찜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원래 학교 가는 날이 아닌데 학과 동생들이 놀자고 해서 나갔다가 인천 도화동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겁니다. 폐 손상이 심했습니다.

최 권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철희씨는 귀에 간신히 들릴 정도로 “엄마·아빠 미안해…”라고 했습니다. 여자친구에게도 힘겹게 말했습니다. 이내 산소호흡기가 꽂아졌습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 눈빛이어서 한글 자판을 집어가며 알아냈어요.”

‘엄. 마. 가. 지. 마.’



가난한 이 살리는 ‘철희의 우물’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간다고 했나요. 철희씨는 그렇게 천국으로 갔습니다. 부모의 심정이야 미루어 짐작하는 바입니다. 최 권사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원망도 했고요. 그러나 부부는 주일예배 중 김명서 목사의 ‘아들 사망진단서’ 고백과 ‘생명수 말씀’에 아들을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부부는 교회 ‘새암선교회’ 힘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섬김의 방향은 물과 같다’고 기록한 아들의 뜻에 따라 필리핀의 가난한 이들 구령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우물 파주기에 나서서 ‘철희의 우물’이 용솟음치게 한 것이지요.

철희씨의 1만명 전도 서원과 그 부모의 ‘철희의 우물’ 기증에 감동받은 가좌제일교회 교인들은 그 사역에 동참키로 했습니다. ‘철희의 우물’에 이어 ‘난숙의 우물’이 두 달 뒤 마람바라는 마을에 설치됐습니다. 우물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지요. 난숙에 이어 은혜, 일교, 연충, 한나, 종호, 주영, 상연, 중부의 우물이 뒤따랐습니다. 그 우물 릴레이는 21일 현재 81호 ‘정운의 우물’에 이르렀습니다.

최 권사 부부는 ‘천안함 침몰 사건’(2010년 3월) ‘세월호 침몰 사건’(2014년 4월)에서 자식 잃고 애통해하는 부모의 절규를 들어야 했습니다. “살아서 겪을 일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최 권사는 지난해 8월 ‘철희의 우물’에 다녀왔습니다. 레가스피에 태풍이 1주일 안에 세 번이나 닥쳐 일대 물이 뒤집혀 식수가 고갈되었는데도 ‘철희의 우물’만은 말짱했답니다. 관리 수녀님이 “성령의 보호하심을 입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기적을 낳고, 기적은 생명수를 퍼올립니다. ‘철희의 우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천=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