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춘 (4) 21세 어린 나이에 회사 설립 “주님 감사합니다”

입력 2015-03-23 02:08
회사 설립 12년이 지난 1989년, 사장실에서 집무하는 이상춘 이사장. 당시 33세였다.

기술자로 제법 많은 봉급을 받은 나는 최소한의 용돈만 남기고 모두 시골 부모님께 보냈다. 부모님은 이 돈을 쓰지 않으시고 모았다가 땅을 사셨다.

이렇게 다른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던 중 할아버지가 다시 나를 부르셨다. 그래도 인척인 내가 성실하게 일했고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았다. 나도 같은 대우라면 할아버지 일을 돕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다시 복귀했다. 복귀 후 빠른 승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3년 만에 복귀해 그동안 닦은 기술과 성실성으로 최고 기술자로 인정받았고 빠른 승진이 이어져 공장장이 되었다. 한 번 외유한 것이 내 주가를 더 높여준 것이다. 월급도 6만5000원을 받았다. 그런데 회사 내 큰 문제가 생겼다.

할아버지께서 후두암 판정을 받아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셨기에 충격이 컸다. 공장 내부는 모두 나에게 맡기고 있었지만 외부와 총괄은 할아버지의 동서가 맡고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공장은 할아버지 동서에게로 넘어갔다. 그때 할아버지 친척은 모두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와 거래하던 오명평 사장님이 찾아와 직장을 구해 놓았느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했더니 이참에 기술도 좋고 하니 공장을 한번 시작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셨다. 근데 나는 나이도 어리고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했더니 자기가 도와줄 테니 한번 해보라 용기를 주며 권유하셨다. 그래서 이때가 기회라 여기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난 21세였다. 공장을 시작하려면 최소한 250만원 정도는 필요했다. 공장을 얻고 시설을 갖추는 데 필요한 최소 비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할 정도로 배짱을 부린 것 같지만 난 용기를 내 일단 창업을 하기로 하고 아버님께 의논을 드렸더니 한번 해 보라고 또 용기를 주셨다.

1977년 당시 공장장으로 내가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 120여만원과 아버지가 내가 보탠 돈으로 사두셨던 논 3마지기를 다 팔아서 모두 150만원을 마련했다. 부족한 100만원은 시골에서 소도 팔고 부모님이 동네분들에게 이자를 주기로 하고 빌려 보내주셨다.

1977년 5월 20일, 나는 용산 신계동에서 대신스프링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식을 가졌다. 직원은 나를 포함해 총 5명이었다. 100㎡(30평) 가게에 기계를 몇 대 들이니 내부가 꽉 찼다. 비싼 백색전화를 한 대 들이고 낮엔 내가 거래처를 다녔고 밤엔 수주 받은 것을 직원들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낮엔 영업, 밤엔 작업하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과 시골의 부모님, 형제들의 기대를 생각하면 더 열심히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여동생이 올라와 직원들 식사를 해주기로 해 고마웠다. 난 사장이 아니라 영업사원이자 공장장이었다. 교회는 잘 못 나갔지만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부족하고 어린 제가 이렇게 회사를 차리고 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회사를 잘 운영해 많은 돈을 벌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응어리를 풀게 해주세요. 그리고 저처럼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기 힘든 학생들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나의 이 기도는 참으로 단순했지만 하나님은 분명 듣고 계셨고 이후 나의 삶 속에서 참으로 천천히 천천히 역사해 주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