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면 보랏빛 물결을 이룬다는 패랭이꽃은 아직은 누렇게 시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 19일 찾은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의 산 중턱에 위치한 ‘뮤지엄 산(SAN·옛 한솔뮤지엄)’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습관처럼 두르고 나온 겨울 머플러가 민망했다.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73)가 설계한 미술관으로 가기위해선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긴 돌담길을 걸어야 한다. 그 자체가 명상의 통과 의례이다. 플라워가든, 스톤가든 등 야외 곳곳에는 알렉산더 리버만, 헨리 무어 등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배치돼 있다.
미술관으로 봄마중을 가보는 건 어떨까. 우선 미술관 자체가 산을 끼고 있어 싸한 흙냄새를 맡으며 물 오른 나무의 연두빛 아우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어야 제격이다. 물론 잘 짜여진 기획전은 기본이다.
‘뮤지엄 산’에서 20일 개관한 ‘하얀 울림-한지의 정서와 현대미술전’은 현대미술로서의 한지 40년사를 보는 듯하다. 창호지나 기름병을 싸던 종이, 혹은 서예의 바탕으로서만 존재해왔던 한지는 1980년대부터 현대적 조형 매체로 활발히 쓰이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사진작품에도 응용이 돼 한지의 무한변신을 엿볼 수 있다. 작가 40여명의 작품 100여점이 총집합했다. 단색화의 대가 박서보에서 젊은 사진작가 이정진까지 세대를 아우른다.
전시는 조형미를 보여주는 한지, 지지체(바탕)로 쓰인 한지, 섬유질로서의 물성을 보여주는 한지 등 세 갈래로 나눠 진행된다. 중장년에게는 한지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살았던 유년의 기억을 건드리는 전시가 될 것 같다.
‘뮤지엄 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미국의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5개 작품이다. 빛을 공간에 가둠으로써 명상의 공간을 연출하는 그의 작품은 어떤 설명으로도 형용하기 힘들다. 오감으로 경험하는 게 최고다. 입장료는 갤러리권(조각공원+미술관)이 1만5000원, 제임스 터렐관을 합친 뮤지엄권이 2만8000원이다. 미취학아동은 무료. 8월 30일까지(033-730-9022).
서울 안에서도 산을 낀 전시공간에 볼만한 기획전을 갖춘 전시를 찾을 수 있다. 인왕산 자락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의 별서였던 석파정을 끼고 있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서울미술관이다. 이 곳에선 이탈리아 ‘국민조각가’ 노벨로 피노티(76)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노벨로 피노티: 본 조르노’전. ‘본 조르노’는 이탈리아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그는 1966년과 1984년 두 차례 베니스비엔날레 이탈리아 대표 작가였고,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교황 요한 23세 납골당 조각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과는 2004년 부산비엔날레 초청작가로 인연을 맺어 을숙도 조각공원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출품된 38점은 대리석과 청동 등 고전적인 조각 재료를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과감한 생략과 마무리를 통해 구상과 추상을 절묘하게 섞으며, 특히 절단된 인체가 거의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2차대전 당시 수레를 타고 피난 가던 한 가족이 폭탄에 맞아 온몸이 산산조각난 걸 눈앞에서 봤다”며 전쟁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작품은 실내뿐 아니라 석파정 잔디공원 곳곳과 사랑채에도 배치돼 있다. 사랑채에는 소녀 두상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 ‘의식’을 앉혀 놓았다. 마치 손님으로 온 서양 소녀가 인왕산 자락의 풍경을 내다보며 명상하고 있는 듯하다. 5월 17일까지(02-395-0100).
원주·서울=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너는 전시만 보러 가니? 나는 봄 구경도 간다… 야외 풍경도 즐길 수 있는 전시를 찾아서
입력 2015-03-23 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