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이든 갈등의 중심에는 정통과 전통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존재한다. 정통(Orthodoxy)이란 시대와 문화가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올바른 진리와 가치이다. 전통(Tradition)은 때로는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오랜 시간 존속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통과 전통이 서로 충돌할 때 사회는 갈등을 겪게 된다.
싸움은 대개 두 개의 극단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한 극단은 전통적인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며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절대시하는 수구주의적 흐름이다. 이는 정통과 전통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여 때로 옳지 않은 전통까지도 정통처럼 고수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러한 경향 속에 사회가 젖어들면 화석화되어 가는 전통과 함께 점점 소멸되어 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극단은 정통을 담고 있는 좋은 전통까지 옛것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배척하고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 변화지상주의적 흐름이다.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여기는 이러한 흐름 속에는 변화는 많이 시도하지만 그 방향이 올바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 없는 변화가 되기 쉽다.
미국의 미래교회 학자 레너드 스위트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꿈은 새것처럼 좋은(good as new) 교회가 아니라 오래된 것처럼 좋은(good as old) 교회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너무 전통적이라는 것이라기보다 충분히 전통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교회는 전통의 많은 부분을 무시하며 전통에 대한 한 가지 고정된 해석으로 미래를 붙잡고 있다.”
현대 교회의 문제가 충분히 전통적이지 못해서이며 전통의 많은 부분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지적은 다시 말하면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정통은 발견하지 못하고, 정통과 상관없는 일부분의 전통을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어느 교회 문 앞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모든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고 들어오십시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모험가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모험이다. 인생에서 위험하지 않은 것은 없다. 위험하다고 모험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교회가 정통성 없는 전통을 변화시키는 모험을 거부한다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모험을 감행했다가 실패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정통을 무시한 모험을 했기 때문이다. 변화 자체를 위한 모험을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모험은 반드시 과거의 신앙 정통에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 교회의 정통은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 정통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살아 있는 교회가 정통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말씀과 성령이 교회의 전통을 새롭게 창조하며 변화한 것이다.
항해 중인 배가 허리케인을 만나면 닻을 앞으로 던져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배를 잡아당겨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이 전혀 없어 움직일 수 없을 때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교회의 닻과 같은 정통이다. 변할 수 없는 비전이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전혀 문제가 없는 교회 역사가 아니었다.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교회도 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전통을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시켰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부흥’에서 죽은 정통의 문제를 지적한다. 죽은 정통은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말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교회의 해석과 교권주의적 제도(전통)를 하나님의 말씀(정통)보다 더 권위 있게 여기는 것이다.
정통이 살아 있는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며 열정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며 도전하고 변화한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정통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통이라도 변화시킬 각오를 하며 앞으로 전진한다. 한국교회는 생명력 없는 전통을 절대시하며 죽어가는 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통이 살아나는 교회가 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정통으로 전통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전통이 정통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이재훈<온누리교회 목사>
[이재훈 칼럼] 정통과 전통
입력 2015-03-21 0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