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檢, 시민에 물었다 “구속해야 할까요”… 연인 위해 집까지 마련해 줬는데 바람나 상대 남성 폭행

입력 2015-03-20 02:02

지난해 11월 어느 날, 충북에 사는 회사원 A씨(33)는 연인 B씨가 다른 남성 C씨와 함께 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B씨가 다른 남성과 밤을 지새운 그 집은 A씨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격분한 A씨는 주변에 있던 철근을 들어 C씨의 머리를 내려쳤다. C씨는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었다.

사건을 맡은 청주지검 제천지청은 A씨의 신병처리를 두고 고심했다. 폭행 정도만 따져보면 구속영장감이었다. 하지만 집을 비롯해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던 A씨가 연인의 외도를 목격했을 때 느꼈을 순간적 분노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결국 제천지청은 검찰시민위원회에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물었다. 시민위는 지난 1월 ‘우발적 범행에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며 구속영장 청구는 적정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 담당검사는 A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위상 높아진 시민위…“시민위원 판단은 상식적 법감정”=검찰은 지난해 9월 대검찰청 예규인 ‘시민위 운영지침’이 개정되면서 특정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까지 시민위에 묻고 있다. 시민위 판단에 구속력은 없다. 시민위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말라고 해도 검찰이 이를 반드시 이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검찰의 가장 막강한 권한 중 하나인 구속영장 청구권한이 심의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시민위의 위상이나 역할이 그만큼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예규 개정 이후부터 지난해 말까지 세 달 동안 전국 일선 검찰청에서 시민위에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물은 사안은 73건에 달한다. A씨 사건처럼 담당검사가 판단을 내리기 애매한 사건이 대부분이다.

지난해 울산에서 일어난 학교폭력 사건이 이런 경우다. 한 여고생이 학교폭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자 울산지검은 가해자 D양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놓고 시민위에 판단을 구했다. 피해자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결과만 보면 구속영장 청구는 당연했지만 초범의 여고생이라는 점이 판단을 어렵게 했다. 폭행 정도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시민위는 구속영장 청구가 적정하다고 의견을 냈다.

하지만 시민위 판단에 따라 청구한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검찰 관계자는 “평범한 시민들이 위원이기 때문에 법리적으로 치밀하지 못할 수도 있다”면서도 “위원들의 판단이 상식적 법감정이라 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검찰도 시민위 의견에 따르는 편”이라고 말했다.

◇시민위 회부 건수 5년 만에 10배 증가=시민위는 2010년 김준규 검찰총장 시절 ‘스폰서 검사’ 사건을 계기로 도입됐다. 검찰 권한 견제가 목적이다. 고위 공직자 부정부패 사건, 금융·경제범죄 사건, 지역사회 이목이 집중된 사건 등에서 필요한 경우 시민위 의견을 구하도록 했다. 제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기소·불기소 여부, 법원에서 기각된 구속영장의 재청구 여부, 구속취소 여부가 심의 대상이었다.

2010년 132건이었던 시민위 심의 건수는 지난해 1286건으로 10배가량 늘었다. 한 대검 간부는 “법적 기준만으로 구체적 사건을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에는 시민위원의 상식적 의견을 묻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살배기 아들을 매일 10시간씩 집에 홀로 둘 수밖에 없었던 E씨(33·여) 사례가 대표적이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E씨는 혼자 있는 아들이 굶을까 매일 밥통에 밥을 채우고 뚜껑을 열어뒀다. 온몸에 밥풀을 묻힌 채 집에 방치된 아이를 본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광주 시민위는 지난해에 E씨를 기소하는 대신 실질적으로 모자를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이 간부는 “기준만 따지는 일부 검사보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시민들의 지혜가 훨씬 사건 해결에 적합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반면 시민위 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일반인으로 구성되다 보니 법리적으로 치밀하지 못해서다. 검찰이 ‘부담스러운 사건’의 책임을 시민들에게 전가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은 지난해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의 공연음란 사건을 치료 조건부 기소유예 결정했다. 당시 시민위의 의견에 따른 것이라 설명했지만 제 식구 감싸기에 시민위를 방패막이 삼았다는 비난이 제기됐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