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47) 교회 위의 복음 외친 츠빙글리-찬란한 풍광의 스위스에서

입력 2015-03-21 02:00
찬란한 풍광을 지닌 스위스에서 500여년 전, 부패한 스위스 교회에 맞서 백성들을 영적으로 일깨우고자 애썼던 츠빙글리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은 한적한 스위스 풍경.

2012년 4월,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오는 알프스 산맥 길은 찬란한 풍광을 자랑했다. 투명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한 하늘 아래 굽이쳐 도는 골짜기와 마을들의 풍경을 사색함은 땀으로 흥건한 채 험한 산을 오른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은 감격이었다. 하나님의 터치가 예술을 뛰어넘는 예술이었다고 해야 할까.

500여년 전, 이 아름다운 대지를 품고 살던 한 남자는 종교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여러 사안에서 답답한 조국 교회의 현실에 가슴을 때리던 나는 그의 일대기를 대하고선 흠뻑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은 지금 바라보는 스위스의 자연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츠빙글리. 그는 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한 무렵 종교개혁에만 멈추지 않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시대의 불의와 맞섰다. 당시 스위스의 교회 부패는 면죄부만을 팔던 다른 나라와 달리 더욱 교묘하고 악하게 진행되었다. 자국의 청년들을 선별해 로마 교황청에 용병으로 보낸 것이다. 겉으로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안수를 받는 용맹함과 정의감으로 포장된 그들이었지만 실상은 그들을 중개한 정부 관료들과 상인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취하게 해주는 경제 구조의 희생자였다.

게다가 참전 후에는 사망으로 과부가 양산되거나 부상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함께 군종 사제로 전쟁에 참가했던 츠빙글리는 돈이라면 종교까지 장사로 이용되는 썩어빠진 현실을 개탄하며 참혹한 전쟁 후유증을 목도해야 했다. 신약성경을 통해 초대교회 정신으로의 회복을 꿈꾸던 그가 세상의 뒤틀린 야망에 맞서는 것은 권력의 정점에서 자본을 만지작거리던 정치, 종교, 경제 거물들과의 거친 암투를 이겨내야만 하는 위태로운 도전이었다.

츠빙글리가 백성들을 영적으로 일깨우길 원했던 건 전쟁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스위스 교회는 말도 안 되는 편협한 근거를 내세워 신앙체계를 심각하게 왜곡시켰다. 진리의 본질은 말살되었고 행위체계만 남은 규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통제시켰다. 이에 극심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지배층이 쓰던 라틴어가 아닌 대중 언어로 설교하기 시작했고, 성례가 아닌 강해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파했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성경을 더욱 파고드는 개혁주의 설교를 통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역사의 물줄기를 튼 그는,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칼뱅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자신을 고발한 콘스탄츠의 주교에 맞서 ‘67개 조문’을 통해 복음이 교회 위에 있음을(1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임을(7조), 사죄권은 하나님에게만 있음을(50조) 선언하며 공고한 기득권층의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신앙적인 개혁 못지않게 그는 정치 개혁 및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했다. 해서 학교 교육을 변화시키는 데 공을 들였고, 종교 지도자들이 신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학문 연구에도 발을 넓혀야 함을 역설했다. 유명한 에피소드인 사순절 금식계명 위반과 설교자임에도 칼을 들고 카펠 전쟁에 참전했던 그가 어떤 신앙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삶으로 드러냈는지는 이에서 명백하게 나온다.

비록 전쟁통에 붙잡힌 뒤 이단아로 낙인 찍혀 화형에 처해졌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맘몬을 숭상하며 권력 앞에 타협하는 작금의 한국교회에게 그의 삶과 신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 간 한 인생을 통해 한국교회에도 츠빙글리 같은 설교자가 있기를, 복음의 사명에 사로잡혀 세상 욕심 다 버리고 하나뿐인 인생 전부를 걸 만한 믿음의 리더가 있기를 갈망하면서 스위스의 마지막 언덕길을 넘어 리히텐슈타인으로 들어섰다.

문종성 작가(vision-mat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