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상징들 가운데는 서로 정반대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백설공주 이야기 속 왕비의 마법 거울은 자기도취(나르시시즘)의 도구입니다. 반면 서정주 시인 ‘국화 옆에서’ 속의 거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누님이 마주한 거울은 자기성찰의 도구입니다. 두 상징의 성쇠도 엇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법 거울은 소위 ‘셀카’로 변신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반면 기도(祈禱) 이상의 변신은 하지 못하는 ‘성찰 거울’은 구시대적 유물로 도외시되는 풍조입니다.
성경에서 거울은 당연히 성찰의 상징입니다. 하나가 ‘생각’(고전 13:11)에 대한 성찰이라면 다른 하나는 ‘행위’(약 1:23)에 대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희미한 청동 거울 비유는 지적으로 교만한 우리 생각을 겸허하게 만들어 줍니다. 진리와 지식(아는 것)은 다릅니다. 주관인 내가 ‘객관’인 진리에 관계될 때 얻어지는 것이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선명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인간의 지식은 희미하다는 말씀 속의 대비는 이런 구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3:18). 하지만 모든 신앙의 진리가 우리에게 선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에야 환히 드러나는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암시되어 있는 ‘숨겨진 2인치’ 즉 진리와 지식 사이에 끼어 있는 인식 주관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겸손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조차 재단하는 가위질을 멈추고 주님 앞에 ‘금쪽같은 내 지식’을 내려놓거나 주 안에서 다른 성도들을 관용할 수 있는 여지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가 신앙 지식에 대한 것이라면 야고보서의 거울 비유는 신앙 지식의 실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앙의 진리를 알지만 실행하지 않는 성도는 이 말씀에서 이렇게 풍자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이쑤시개를 들고 거울 앞에 섭니다. 그런데 거울을 통해 고쳐야 할 곳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에 빠져 씽긋 웃고 거울을 떠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는(약 1:22) 실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찰의 거울인 말씀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성화되어 갈 때 복을 누린다는 것이 이 거울 비유의 교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신실하게 초기화하는 신앙 계절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제 돌아와 성찰의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성경의 거울 비유를 통해 생각과 행위를 새롭게 하는 힘을 얻으시고, 아울러 성막 물두멍을 위해 소중한 거울을 봉헌한 여인들(출 38:8)처럼 이러한 성찰의 거울이 헌신의 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신솔문 목사(전주갈릴리교회)
[오늘의 설교] 두 거울
입력 2015-03-20 02:39 수정 2015-03-20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