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춘 (3) 첫 직장 스프링공장… 고된 일과에도 월급 300원

입력 2015-03-20 02:37
상록수장학재단 장학금 수여식 후 학생들과 함께 한 이상춘 이사장(앞줄 가운데). 지난 7년간 1356명이 혜택을 입었다.

내가 기술을 배우기로 한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스프링 공장은 친척 할아버지가 운영하신다니 안심이 되었고 회사도 제법 클 것이라 생각돼 나름 대우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중 나온 직원을 따라 공장에 들어선 순간 기대는 바로 걱정으로 바뀌었다. 어두컴컴한 공장 안에서는 기계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나며 나를 맞았다. 바닥도 기름범벅이었고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 차림의 공원들이 어떤 새내기가 오나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온통 기름때로 번들거렸고 이빨만 하얗게 보였다. 숙소는 더 충격적이었다. 시멘트 벽돌로 대충 막은 공간에 때에 절은 이불이 있고 옷가지와 생필품들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공동 숙소가 이곳이라니 그저 울고 싶었다. 폐유로 난방을 해서인지 곳곳이 그을음투성이였다. 요즘으로 치면 주물공장과 비슷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고된 일과가 시작됐다. 선후배의 위계질서는 군대 군기보다 더 셌다. 계속 공장 청소와 공구정리, 식사당번만 죽도록 시켰다. 시킨 일 외로 기계를 작동하거나 허락되지 않은 공구를 만지면 그 자리서 뺨을 맞거나 공구가 그대로 날아왔다. 깜빡 졸다 밥이라도 태우면 난리가 났다.

식사는 항상 제일 늦게 입사한 사원이 후임자가 올 때까지 한다. 자취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즉석에서 김치를 쑥쑥 썰어 넣고 끓이는 찌개와 금방한 밥에 마가린을 넣고 비벼먹는 맛은 지금도 군침이 돌 만큼 맛있었다.

‘용산 스프링’이란 이름의 우리 회사는 각종 기계에 들어가는 크고 작은 스프링을 만들었는데 직원이 15명인 간이수공업 형태였다. 그런데 견습생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단순노동만 시켜 불만이 컸다. 가끔 얼굴을 뵈는 할아버지는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만 하셨다.

첫 월급봉투가 나왔다. 내 이름이 적힌 노란봉투에 든 액수는 300원이었다. 한 달에 두 번 노는 휴일 날, 이 돈으로 작업복 사고 극장 한번 가고 목욕과 이발한 뒤 30원 하는 짜장면 한 그릇 사먹으면 딱 맞는 액수였다.

작업 ‘시다’ 노릇을 몇 개월 하면서 이곳에선 기술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월급보다도 난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선배가 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나는 같은 일만 반복해서 해야 한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 공장안 내부를 잘 청소하고 시키지도 않은 선배들의 작업복과 장갑을 깨끗이 빨아 주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이렇게 선배들에게 잘 보여야 아주 기초적인 일들을 하나둘 배우게 해 주었다.

쉬는 주일 날, 가끔은 공장 근처의 교회를 찾았다. 예배당에 앉으면 마음에 편안함이 있었고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 친구들이 생각나 남모르게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반드시 성공해서 보란 듯이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말이다.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고 내 밑으로 후배들이 들어왔다. 월급도 2500원 정도를 받을 만큼 준기술자 대우를 받던 때였다. 어느 날, 을지로 대한스프링 공장에서 일하던 사촌형에게 연락이 왔다. 용산에서는 더 이상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만큼 기술자 대우를 해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라는 것이었다. 월급도 1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 당시 성실히 일을 잘한다고 할아버지께 인정을 받고 있었던 나는 망설인 끝에 할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3년 뒤 반드시 기술자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겼는데 바로 월급 1만원을 주었다. 꽤 큰돈이어서 서울에 올라온 이후 처음으로 뿌듯하고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