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너스바움이란 이름을 국내에 알린 건 2013년 출간된 ‘시적 정의(Poetic Justice)’(궁리)라는 책이다. 문학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법관이나 정치가 등 공적인 삶이 요구하는 판단을 보다 잘 내릴 수 있게 만든다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은 지금까지 5000부 이상 팔리며 인문서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앞서 2011년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2012년 ‘불편한 인터넷’(공저) 등 너스바움 책이 두 권 나왔지만 한국 독자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 계기는 ‘시적 정의’라고 볼 수 있다.
너스바움은 ‘김영란법’을 만든 김영란 전 대법관이 근래 강연회에서 언급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판사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를 고민하는데 ‘시적 정의’가 하나의 해답을 줬다며, 너스바움의 사상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미국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법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는 68세의 여성 교수 너스바움이 올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선의 연약함’ ‘사고의 격변’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혐오와 수치심’이 이번 주 출간됐고, 2013년에 쓴 ‘정치적 감정(Political Emotions)’이 하반기에 나올 예정이다. 이밖에도 몇 권이 책이 더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혐오와 수치심’을 편집한 민음사 편집부의 양희정씨는 19일 “너스바움은 지난해 영어권 인터넷에서 인용, 검색, 링크를 합해서 가장 많이 언급된 사상가 순위에서 노엄 촘스키와 공동으로 22위에 올랐다”면서 “이 순위는 교황이나 소설가, 과학자 등을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너스바움의 사상가로서의 지위를 가늠케 해준다”고 말했다.
너스바움은 1980년대부터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90년대 초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과 함께 국내총생산(GDP)이 아닌 인간의 행복에 주목한 인간개발지수(HDI)를 개발하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 들어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 선정 ‘세계 100대 지성’에 세 차례 선정되기도 했다.
‘시적 정의’를 번역한 박용준씨는 “너스바움은 한국에서 뒤늦게 소개됐다”면서 “너스바움은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을 전공했고 연극 공부도 했으며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 문헌연구자, 여성학자로 활동하면서 통합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혐오와 수치심’의 번역자 조계완씨는 “너스바움은 우리에게 고귀함과 연약함이 공존하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을 바라보게 한다”며 ‘인간의 취약함에 주목한 정치철학자’로 설명했다.
법과 정치에서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스바움처럼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경우는 드물다. 인간을 깊게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인간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의 핵심은 인간의 본질적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취약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법과 정치, 제도 등이 구축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다.
‘시적 정의’에서 인상적으로 표출된 이 같은 너스바움의 사상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감정을 배제한 법이란 바람직하지도 않고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폭행에 대한 분노, 자신의 생명이나 평판에도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은 타당한 감정으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돼야 한다.
그러나 혐오와 수치심은 법적 역할에 개입돼선 안 된다며 구별한다. “이 두 감정은 사회 내에서 취약한 위치를 지닌 집단을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이룬다.
사람들은 끔찍한 살인자나 아동 성범죄자를 인간쓰레기나 벌레처럼 여긴다. 너스바움은 이를 자신이 지닌 인간적 약함을 숨기기 위해 범죄자의 비정상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혐오는 상대방도 평등한 시민적 지위를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 것이며, 자신 안의 약함과 문제를 반성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너스바움은 특정 범죄가 특별히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가중 처벌하는 것에 반대한다.
너스바움은 또 전자팔찌나 범죄자 신상 공개 같이 수치심을 주는 처벌에도 반대한다. 수치심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권리와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연관돼 있고, 인간성 자체를 과소평가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대상이 되는 사람이 지닌 평등한 인간 존엄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김 전 대법관은 책 뒤에 장문의 추천사를 썼다. 이 책을 계기로 올해 한국 독자들이 너스바움이라는 사상가를 발견하게 될지 주목된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혐오와 수치심] 또다른 지성, ‘너스바움’을 만나다… 출판계 ‘너스바움 현상’ 예고
입력 2015-03-20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