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사고는 인재(人災)다. 이를테면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부모의 아동 학대가 낳은 죽음까지도 그렇다. 재난은 천재지변이나 전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재난은 사회적 ‘을’에게 집중된다.
구병모(39·사진)의 소설집에 수록된 8편 단편에는 억울하게 재난을 맞게 된 ‘을의 아우성’이 넘쳐난다. 단편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작동이 이상해 모두가 불안해했으나 ‘설마 내게’하는 방심을 비웃듯 잠든 아기를 혼자 집에 두고 나온 엄마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추락사한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그런 트라우마를 갖고 자란 아이의 사회에 대한 복수는 고층 아파트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괴벽으로 표출된다.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시민적 노력도 있다. 단편 ‘이창(裏窓)’의 주인공이 그렇다. 앞 동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훤히 보이는 아파트의 구조 때문에 우연히 엄마가 초등생을 학대하는 모습을 발견한 나는 경찰에 신고한다. 그런 나의 노력은 남편한테서조차 ‘오지라퍼’(오지랖 넓은 사람의 영어식 조어)로 핀잔을 받을 뿐이다. ‘일상에서의 작은 실천들이 사회 정의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내게 남편은 퍼붓는다. “쓸데없는 유난 떨지 말고! 세상에 당신만 잘났고 당신만 배웠어?” 한 때 학생운동 한 건 뭐냐는 아내의 힐난에는 이렇게 반격한다. “내가 그때 마음하고 똑같이 살았다면 지금 회사에서 과장까지 올라갔겠어?” 그렇게 타협의 결과물로서 나온 사회적 무관심의 끝에 엄마에게 학대받은 아이는 또 죽고 만다.
구병모의 단편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뻗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는데서 오는 것 같다. 단편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은 기괴하다. 어렵게 대학을 나온 딸은 쇼핑몰 고객 상담실에서 일해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구조조정으로 잘리게 됐고, 딸이 나온 대학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게 보람인 아빠는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해고된다. 막다른 코너에 몰린 그들의 손에서는 공통적으로 푸른 물이 나오고 어느 순간 몸은 덩굴식물이 된다. 그렇게 ‘식물인간’이 되어서야 복수에 성공하는 설정은 현실의 무력감만 증폭시킬 뿐이다. 성장소설의 서사에서 벗어나 사회 문제로 관심을 확장하는 작가의 메시지는 우리를 무겁게 하고 답답하게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사회 고발자로서의 소설가의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 재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乙들의 아우성’
입력 2015-03-20 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