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의 히딩크라. 새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로 시끄러운 요즘 어느 미술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묵은 외국 이름 하나가 어쩜 그렇게 신선하게 들렸는지. 풀리지 않는 매듭을 단칼에 내리쳐 해결했던 ‘알렉산더 대왕 식 해법’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대와 홍익대 미대 간 파벌 싸움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날이 시퍼렇다.
서울대 미대 교수 출신의 전임 정형민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전을 서울대 출신 작가 위주로 꾸몄다는 이유로 홍역을 치렀다. 그를 직위해제시킨 홍대 교수 출신의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산하 기관장의 홍대 줄채용 논란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공모 절차가 진행되면서 6배수로 압축된 국립현대미술관장 후보자 중에는 홍대 교수가 포함돼 ‘냄새가 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억울하다고 항변해봤자 진영 논리가 팽배한 이 나라에선 ‘오얏나무 아래서 맨 갓 끈’일 수밖에 없다. 정서를 고려해 정치적 안배를 한들 차선(次善)이 아닌 차악(次惡)일 뿐이다. 이런 연줄 저런 연줄의 논란을 피할 수 있는 ‘수입산’이 낫겠다 싶었다.
히딩크의 이름값은 ‘히딩크 리더십’이 논문감이 됐다는 걸로도 증명이 된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기용된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은 소신과 원칙의 용병술로 약체 한국 팀에 4강 신화를 안겼다. 이것저것 눈치 볼 거 없는 해외파 실력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란 눈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외풍에 휘둘리지 않을 실력을 갖춘 소신파라면, 글로벌 경쟁시대를 헤쳐 갈 국제적 감각을 갖춰 K-아트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히딩크 같은’ 인물이라면 말이다. 몇몇 거론되는 인물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관장 선임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고위공무원단 나급이다. 정부 부처 2급 국장급 수준이며 연봉은 각종 수당을 합쳐야 1억원 안팎이다. 고미술을 관장하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차관급인 것에 비하면 현대미술이 홀대 받는 격이다. 연봉은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사례처럼 애국심으로 감수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 체재비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히딩크 같은 인사의 스카우트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현행 선발방식인 공모제도 문제다. 외견상 투명해보이지만 편의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낙하산’이 내정된 상태에서 나머지가 들러리 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술평론가 Y씨는 “진짜 실력 있는 사람들은 괜히 나섰다가 웃음거리 될까봐 피한다. 떨어져도 그만인 사람, 그저 직장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나 응모하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이제 근본적으로 제도 개선을 검토할 때다.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주장이 타당성 있게 들린다.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을 스카우트하기 위해선 지금의 직급이나 보상 규정 틀을 깨야 한다. 공무원 조직은 기관장에 대한 처우 규정이 획일적으로 적용돼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공무원 조직이기에 감당해야 할 보이지 않는 규제도 많다. 이것저것 꽉 채운 갑옷의 조직이다.
법인화할 경우 재단 이사회를 통해 기관장 선발 규정을 현실에 맞게 조정함으로써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실력자를 ‘모셔올 수 있는’ 여지를 키울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화융성’을 내세웠지만 아직까지 내세울 치적이 없다. 모든 조직은 CEO의 역량만큼 큰다.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국립중앙미술관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눈길을 돌려보는 건 어떤가.
손영옥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내일을 열며-손영옥] 미술계의 ‘히딩크’를 許하라
입력 2015-03-19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