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춘 (2) “동생 4명 위해 고교 입학 대신 기술 배우거라”

입력 2015-03-19 02:27
중학교 앨범에 남아 있는 이상춘 이사장의 졸업사진.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미션스쿨인 시온중학교에 입학해서 교회를 다녔던 이력 때문에 학교에서 종교부장을 맡았다. 이 직책은 성경 과목 시간에 교목을 도와 학생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돕고 행사 시 대표기도를 하는 등 역할이 꽤 중요했다.

개구쟁이었던 초등학교 때와 달리 중학생이 되자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상위권인 모범학생이 되었다. 졸업반이 되어 인근 성의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입학시험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상춘아 이리 좀 와서 앉아라” 하셨는데 나를 불러놓고도 한참이나 아무 말씀이 없이 담배만 계속 피우고 계셨다.

예감이 좋지 않아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한참을 머뭇거리시다가 어렵게 입을 여셨다. 미안하지만 고등학교 시험치지 말고 서울 올라가 친척 할아버지 회사에 가 기술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아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여쭈었더니 내가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동생 4명을 중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맏이인 네가 양보해 서울로 가서 기술을 배우라는 말씀이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이제 시험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험이라도 쳐보아야지요. 그리고 가든 안 가든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드시면서 “아니다 만약 시험을 쳐서 합격이 된 뒤 서울을 보내게 되면 아비 마음이 얼마나 더 아프겠느냐 그러니 어차피 가야 될 것 같으면 시험보지 말고 그냥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난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며칠을 생각해도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우리 집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우셨고 아버지도 내내 침울하셨다. 더 공부하고 싶어 하는 장남을 공부시키지 못하고 서울로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는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릿해진다. 그리고 학비가 없어 공부를 못했던 피눈물 나는 아픔이 결국 오늘 내가 상록수장학재단을 설립해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는 첫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1년 3월 1일로 선명히 기억한다. 난생 처음 서울로 가기 위해 김천고속버스터미널에 갔다. 간단한 옷보따리를 들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내 뒤로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울컥 쏟아져 엉엉 울고 말았다.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동시에 마음으로 다짐하는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하나님, 저는 서울에 가서 꼭 사업가가 되어 성공하고 싶습니다.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 슬피 우신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공부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가는 만큼 반드시 성공하게 도와주세요.”

열다섯 살 소년의 기도는 차라리 절규였다. 침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버스가 서울에 도착하자 내 눈 앞에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버스터미널은 지금처럼 강남이 아니라 동대문에 있었다.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고속버스가 막 운행을 시작했을 때였다. 시골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높은 빌딩이며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나가는 사람 코도 베어간다’는 서울에 첫발을 내딛은 내 주머니에는 아버지가 꼬깃꼬깃 모아준 단돈 500원이 들어 있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