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은 데뷔 50년을 맞은 2012년 기획됐다. 임 감독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연출을 시작한 후 숱한 화제작을 내놓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된 ‘화장’은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김훈의 ‘화장’을 원작으로 하고, 국민배우 안성기가 주인공을 맡았다는 점 등에서 관심을 모았다. 17일 시사회를 가진 ‘화장’의 관람 포인트를 소개한다.
◇김훈의 소설에 임권택이 세련된 영상을 입히다=‘화장’은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를 지내는 화장(火葬)과 분칠로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두 여자 사이에서 번민하는 중년 남자의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원작은 젊은 여자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통해 인간의 생로병사를 묘사했다. 소설은 드러내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게 더 많다.
임권택은 김훈의 ‘칼의 노래’ 영화화를 생각하다 여의치 않자 ‘화장’으로 선회했다. 중병을 앓고 죽어가는 아내를 보살피던 중년이 젊은 여자에 빠져 결국 둘 다 떠나보내는 얘기에 중점을 두었다. 원작은 힘은 있지만 극적인 드라마는 부족한 편이다. 영화는 주인공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가면서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들을 잘 드러냈다. 임권택의 노련함이 빚어낸 솜씨라고 하겠다.
◇안성기와 임권택이 8번째 만남으로 호흡을 맞추다=안성기는 1964년 ‘십자매선생’으로 임권택과 처음 만났다. 이후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3) ‘오염된 자식들’(1982)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취화선’(2002)을 같이 찍었다. ‘화장’은 두 사람이 11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다. 영화 기획단계에서 안성기가 출연 의사를 밝혔고, 임권택이 당연하고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의기투합했다.
안성기는 임권택의 믿음에 부합했다. 화장품 대기업 중역인 오상무 역을 맡아 내공으로 다져진 깊이 있는 연기력을 발휘했다. 죽음과 젊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년 남성의 연민과 고뇌를 안성기만큼 섬세하게 표현하는 배우가 있을까.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한 안성기의 58년 관록이 묻어나는 연기가 관객들로 하여금 한눈팔지 못하게 한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갈채와 호평이 쏟아지다=국내 개봉도 하기 전에 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알아보고 초청했다. 제71회 베니스, 제39회 토론토, 제33회 벤쿠버, 제19회 부산, 제34회 하와이, 제25회 스톡홀름, 제9회 런던, 제25회 싱가포르 등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다. 영화제 관객들은 거장의 작품에 갈채로 응원을 보냈으며 평론가들도 호평했다.
임권택은 최근 몇 년 동안 과거의 삶을 통해 한국적 미를 영화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화장’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새로운 주제의식을 제시했다. 육체의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이라는 깊이 있는 소재를 무르익은 성찰의 시선으로 조명했다. 세계 영화계가 임권택에게 잇단 러브 콜을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규리와 김호정 그리고 명필름이 명품에 가세하다=2004년 ‘하류인생’의 여주인공으로 임권택과 만난 김규리는 극중 안성기의 직장 후배 추은주를 연기한다. 자신에게 점점 빠져드는 선배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뿌리치지 못하는 젊은 여자의 욕망과 고민을 잘 표현했다. 연극배우 출신의 김호정은 죽어가는 아내의 애잔한 모습을 삭발투혼 연기로 해냈다.
시나리오는 전직 의사 출신이자 의료계 관련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을 연출한 송윤희 작가가 썼다. 제작은 명필름이 맡았다. 작품성은 이미 인정받았고 대중성도 거머쥘 수 있을까. ‘서편제’(1993)로 국내 첫 100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운 임권택. 젊은 감각의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는 요즘 거장의 야심작이 통할지 관심이다. 4월 9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94분.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죽어가는 아내와 젊은 여자, 삶의 두 얼굴… 임권택 감독 생애 102번째 영화 ‘화장’
입력 2015-03-18 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