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시작된 사법시험은 빈자(貧者)의 사다리였다. 가진 게 없는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고 웅변하는 상징이었고, 하나의 문화였다. 이런 사시가 2017년 폐지를 앞두고 있다. 법조계는 사시를 대신할 로스쿨 실험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과연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지금의 과도기가 지나면 미래의 사다리는 어떤 모습일까.2017년 폐지 ‘사법시험’ 오늘과 내일 현장
제57회 사법시험 1차 시험을 나흘 앞둔 지난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골목 사이사이를 트레이닝복에 패딩 점퍼, 백팩 차림의 고시생들이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히잡을 쓴 외국인 여성 셋이 낯선 말로 나누는 수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갈랐다.
절대평가였던 사법시험은 1970년 정원제로 바뀌었다. 동시에 도전자도 크게 늘었다. 관악구의 대학·신림·서림동 일대는 ‘고시촌’으로 명성을 날렸다. 30여년간 사법고시의 안방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로스쿨 도입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다. 고시촌에는 수년째 사시에 도전하는 ‘장수생’만 남았다. 고시생이 떠난 자리는 직장인, 취업준비생, 이주노동자가 채웠다.
3년째 사시를 준비 중인 홍모(26·여)씨도 지난 1월 신림동을 떠났다. 홍씨는 16일 “사시 ‘막차’를 타러 신림동에 들어갔지만 ‘카카오톡 스터디그룹’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엄마 밥’이라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노원구의 본가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카카오톡 스터디그룹은 모바일 메신저로 서로를 독려하는 공부 모임이다.
신림동에서 18년째 헌책방을 운영 중인 이모(63·여)씨는 “로스쿨 도입 이후 학생들이 다 빠져나가 운영이 힘들다”며 한숨을 쉬었다. 돈이 되는 법학 서적이 팔리지 않아서다. 가장 장사가 잘되는 학기 초인데도 가게 안에 손님은 없었다.
신림2동의 한 독서실은 아예 4·5층 문을 닫고 2·3층만 운영한다. 전체 80명 중 사시 준비생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대형 학원 직영 독서실인 우리는 그나마 나은 편이야. 장수생들밖에 남지 않았어.” 총무 김모(35)씨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들 ‘설마 사시를 진짜 없애기야 하겠냐’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사시 55회 합격 ○○○.’ 빛바랜 현수막이 나부끼는 한 고시원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총무 이모(65)씨는 “사시 공부하는 학생도 있지만 행정고시나 공무원·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맞은편 법학 전문학원 앞 게시판은 변호사시험, 로스쿨시험, 5급 행정고시 관련 게시물이 점령했다.
대학동에서 8년째 부동산중개소를 운영하는 엄모(55·여)씨는 “새로 들어온 1인 가구는 대부분 이주노동자나 취업준비생들”이라며 “지역상권이 타격을 입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곳은 관악구 대학동(1만1422가구), 강남구 역삼동(1만1361가구), 관악구 서림동(7625가구) 순이다. 다음 달 29일 치르는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관악을 선거구에 출마할 여야 예비후보들은 모두 사시 존치를 주장하고 있다. 사시가 이 동네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관련기사 보기]
[2017년 폐지 ‘사법고시’ 오늘과 내일] 고시생 떠나는 신림동 고시촌… 막차 탄 장수생 ‘마지막 꿈’
입력 2015-03-17 02:10 수정 2015-03-17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