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명호] 포철 데자뷰

입력 2015-03-17 02:10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어느 날, 포항종합제철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사와 마주 앉았다. 박태준 전 포철 회장의 사람이었다. 민자당 최고위원으로 민정계 수장이었던 박 전 회장은 한때 대권 후보로 거론되며 김영삼 대선후보와 맞서다 결국 수뢰 혐의 등으로 기소되고 일본으로 사실상 정치적 망명을 했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사정 당국이 박 전 회장과 관련된 것은 샅샅이 털었다. 나이 지긋한 고위 임원 중에는 검찰 수사관 앞에서 엎드려뻗쳐는 물론이고 뺨을 맞는 일까지 있었다.” 그렇게 다뤄도 될 만한 분위기 속에서 수사가 진행됐다고 그는 말했다. 박 전 회장의 여비서까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포철 고위직은 싹 물갈이가 됐다. 이어 내부 인사들이 회장-사장으로 들어섰지만 그들도 겨우 1년 지나자 팽(烹) 당했다. 정권 실세에 줄을 댄 누구는 자리를 차지했고, 누가 포철 내부 기밀들을 사정 당국에 들고 가 점수를 땄으며, 어느 실세가 포철 인사에 개입하더라 등등 소문은 꼬리를 물었다. 대체로 나중에 인사를 보면 들어맞는 게 적지 않았다. 81년 신군부가 집권했을 때에도 포철은 인사 문제로 정치적 외풍에 시달려야 했다. 자기 사람을 심겠다는 것은 그 조직이 뭔가 자신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리라.

포철이 포스코로 바뀐 지 13년이 지났지만, ‘포철 잔혹사’는 끝나지 않은 듯하다. 지금 사정 당국이 칼끝을 겨누고 있는 전임 포스코 고위직도 그 자리에 갈 무렵 전 정권 실세의 이름과 함께 언론에 거론됐었다. 지난달 말 한 언론이 포스코건설 비자금 의혹을 보도하자마자 이완구 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이례적으로 개별 기업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강조했다. 이어 담화를 통해 대기업 비자금 등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수사 속도는 아주 빠르다. 국민기업을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는 명분도 비슷하다. 포철 데자뷰(deja vu)인가.

김명호 논설위원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