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가 선교를 준비했던 19세기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이 대두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는 달리 아펜젤러가 가졌던 선교 사상은 보수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가정 환경과 학교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집안은 독일의 개혁교회에 있는 경건주의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스위스에서 이민을 와서 루터교의 신앙을 가졌고, 어머니는 독일 계통 메노나이트파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주일 오후에 어김없이 아펜젤러와 함께 독일어로 된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아펜젤러가 순직하기 1년 전 미국에 있는 아내로부터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망 소식을 전달 받았을 때, 그의 일기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회상을 적었다. “주일 오후, 아버지는 나무 그늘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성경을 읽으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처럼 부모를 통해 독일의 개혁교회적 경건성을 보며 자랐던 아펜젤러는 하이델베르크 신조가 그의 신앙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 미국에 있는 독일 개혁교회는 하이델베르크 신조를 17세기 이후부터 채택, 보편적으로 교회 내 교리서로 사용했다. 아펜젤러는 아버지의 권유로 개혁교회의 목회자가 되기 위해 ‘프랭클린 앤 마샬신학교’에 진학했다.
당시에는 1830∼40년대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 내에 경건성과 함께 뜨거운 부흥의 열정이 공존했으나 부흥운동의 과정 가운데 나타났던 형식적인 문제, 개인주의적 회심을 강조하는 신앙에 대해 개혁교의 유명한 신학자 필립 샤프, 존 네빈 등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의 주장으로 개혁교회는 표면적으로는 교리가 기반이 되는 경건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나 뜨거운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다.
아펜젤러의 고민과 감리교의 선택
아펜젤러는 감리교회였던 프랭클린제일교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했다. 여기서 그는 기도모임과 속회모임을 가지면서 감리교와 친숙하게 됐다. 특히 프랭클린교회 스미스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개혁교회의 엄격한 규칙과 형식에 얽매어 억압적인 신앙생활의 분위기를 떨치고 자유롭게 할렐루야를 외치는 곳을 찾았다”는 그의 고백은 당시 부흥운동의 물결로 뜨거웠던 감리교회의 자유로운 신앙생활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오랫동안 개혁교회의 신학노선을 가야 할지, 감리교회의 신학노선을 가야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경건주의를 지속해 개혁교회의 목회자로 살기에는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던 부흥운동과 선교열에 목말라 있었다. 결국 아펜젤러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감리교회를 선택했고 “마침내 나의 모든 것이 자유로워졌다”는 말로 감리교에서 목회자의 길을 걸어 갈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가 감리교를 택한다 해서 개혁교회의 신학 노선을 버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의 신앙적 경건성은 배재학당 학생의 신앙훈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플랭클린마샬대학에서 매일 드렸던 아침 채플을 배재학당에도 도입했고, 지역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 배재학당의 입학을 허락했던 점 등은 개혁교회의 신학교에서 이루어진 경건성 훈련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는 감리교 학교였던 드류대학의 전신인 드류신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드류신학교는 설립된 지 15년 정도 되었지만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스트롱, 헨리 버츠 등이 포진해있어 영성과 지성의 균형을 갖춘 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아펜젤러의 설교와 그의 신앙
아펜젤러의 설교를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했던 창조자뿐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처럼 인간을 향한 사랑을 끝없이 베푸는 분으로 이해했다. 인류 최초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별한 존재로서 원래 인간의 모습은 영원한 삶과 거룩한 삶을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인 인간에 대한 관계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바탕이 되었지만, 사탄의 유혹으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선악과를 먹게 되었고 이러한 선택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의심으로 여겨져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닌 사탄에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그의 설교를 살펴보면 곳곳에 나타나는 인간의 죄 속성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결단 있는 믿음이 필요하고, 세상의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결단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펜젤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희생하고 속죄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은 세상 것이 아닌 구원의 능력에서 나와야 하며 두려움 없는 존재로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이 인간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영원한 생명, 거룩함이 회복된다고 봤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확신을 갖게 하는 믿음을 주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며 “성령께서 한국에 신속하고 강하고 온유하게 임재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땅에 성령의 물결이 흐르게 하소서”라고 했다.
그의 이 설교는 1902년 그의 삶이 마감되기 직전에 했던 것으로, 1903년 남감리교 의료선교사 토마스 하디에 의해 촉발된 원산 대부흥운동과 이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8) 아펜젤러의 신학 사상
입력 2015-03-17 02:48 수정 2015-03-17 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