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죽산교회] ‘일제 귀신’ 물리치고 지은 예배당… 죽산지방 ‘복음의 씨앗’되다

입력 2015-03-14 02:05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신앙의 길은 세월이 흐른다고 변하지 않는다. 1960년 안성 죽산교회 입구(왼쪽)와 지난주일 죽산교회 입구. '그 시절 어머니들'이 여전히 구원의 길을 오르내린다.
1950년대 일제강점기 신사터 위에 세워진 예배당(왼쪽). 성선복 목사가 교인과 인사하고 있다.
옛고을 죽산 향교(사진 왼쪽)와 관아 자리의 죽산중학교.
세 장의 흑백사진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경기도 안성 죽산교회 곽병숙(72) 권사가 ‘죽산교회 110년사’ 발간(2011년)을 위해 내놓은 사진을 보면서다. ‘1960년 7월 28일’ 교회 계단에서 찍은 사진 속 인물은 40, 50대의 ‘그 시절 어머니’ 네다섯 명이다. 40대 어머니들은 스커트에 블라우스, 흰 양말과 고무신으로 단정하게 멋을 냈다. 50대 어머니들은 검정치마에 무명 저고리다.

그 당시 죽산교회 가는 길 막바지에 70여개의 계단이 있었다. 첫 계단 왼쪽으로 100여년은 넘음직한 느티나무가 그들을 맞았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종탑이 있고 거기서 100여 걸음쯤 더 나가면 목조 예배당이다.

계단 위에 올라 죽산 읍내를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 일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였다. 초가 사이로 미루나무 가지가 바람에 한쪽으로 휘어졌다. 죽산 우시장이 보이고 그 너머 남산(333m)이 병풍을 이뤘다. 가난한 시절이라 산은 벌거벗었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났다.



교회 오르는 70계단, 평생을 오르다

지난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앞두고 70대 권사님이 옛 계단 길을 몇 번에 나누어 쉬엄쉬엄 올랐다. 뒷짐 지고 성경책 넣은 백을 든 채였다. 노(老) 권사 뒤로 옛 초가는 빌딩으로 바뀌었고 미루나무는 베어졌다. 우시장엔 농협이 들어섰고 남산은 울창했다. 그들이 오르던 70계단은 콘크리트 경사길로 바뀌어 차량 통행이 가능해졌다.

죽산교회는 전망이 좋았다. 지금도 읍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이 예배당은 우상을 물리치고 헌당됐다. 1953년 영수 정원재 장로 등은 일제강점기 신사 터였던 현 교회 터에 예배당을 건축했다. 죽산리 구 예배당이 미군의 폭격(한국전쟁) 여파로 금이 가고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늘어난 교인을 다 수용하기에도 좁았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몇 번의 소청 끝에 건축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일꾼 사서 건축할 형편이 되지 않아 교인들이 손수 지었다. 서의관 집사가 선산 나무를 베어 건축 자재로 내놓았다. 지붕은 구 교회당 사택 함석을 벗겨 사용했다. 반면 그 사택엔 초가를 올렸다.

정 장로는 교회 건축을 위해 소 한 필과 논 두마지기를 팔았다. 당시 경기노회장 전필순(1897∼1977·독립운동가) 목사도 다소의 건축비를 보냈다. 그들은 그렇게 ‘일제 귀신’을 물리치고 지은 예배당에서 가마니를 깔고 첫 예배를 드렸다.

충북 진천 출신인 정 장로는 1905년 하와이노동 이민 중 예수를 믿었고 1912년 귀국해 경성성서신학원(서울신대 전신)을 나왔다. 서울 신설리감리교회(현 보문제일교회) 등을 섬기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격동기에 죽산지방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다. 1955년 작고.



충북 지방 복음 전파의 발원지 죽산교회

죽산교회는 충북 첫 교회인 청주 신대리교회의 모교회나 다름없다. 죽산은 조선과 구한말 한양서 경상도로 통하는 교통 요지였다. 한양 판교 용인 죽산 청주 영동 김천 대구로 이르렀기 때문이다. 1914년까지 죽산군이었고 교회가 있는 죽산리는 읍성이었다.

죽산교회는 미 북장로교 민노아(F S Miller·1866∼1937)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민노아 선교사는 죽주산성 아래 미륵당이 있던 둔병리(지금의 매산리 비석거리로 추정)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둔병리 마을 사람 12가구 중 10가구가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사경회를 통해 청주 사람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은혜를 받고 신대리교회 공동체를 시작한 것이다. 장로회연감과 그리스도신문 등이 전하는 사실이다.

이후 죽산교회는 경기 남부와 용인 등의 선교 거점이 됐다. 1930년 10월 19일 동아일보는 ‘죽산 시장에 있는 장로교회에서는 금춘부터 무산아동을 위하야 야학부를 설치하고…남녀학생이 50여명이라 한다’고 보도할 만큼 문맹 퇴치와 교육사업에도 열심이었다. 30년대 말 교인 수는 85명(경기노회 회의록)이었다. 그러나 죽산 3·1운동 만세 여파 이후 일제의 교회 탄압, 전래 종교의 강세로 교회가 위축됐다. 그리고 전쟁 이후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정체의 길을 걸었다.

‘죽산교회 110년사 발간 위원’들은 이 같은 정체 이유에 대해 ‘오랜 역사에도 인재를 많이 배출하지 못한 점’ ‘지역사회 봉사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을 꼽았다. 대개의 개교회 발행 교회사가 진솔한 자기 성찰 없이 과장하기 일쑤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다윗과 같은 자기 반성적 신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교회’ 자녀가 섬겨

이 같은 회개는 축복으로 이어졌다. 지난 1일 주일. 죽산교회는 설립 114주년을 맞아 입당 감사예배를 올렸다. 장 장로 등이 세운 목조교회는 1978년 콘크리트 건물로 봉헌된 후 세 번째 헌당이었다.

죽산교회는 면 단위 시골교회 대개가 교인이 줄어드는데도 꾸준히 증가했다. 이 때문에 60∼70명 기준의 옛 예배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지난 주일 출석 교인은 160∼170명이었다.

교회 성장은 곽 권사와 같은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곽 권사는 죽산교회 초기 교회 터인 매산리에서 10리(4㎞) 길을 걸어 출석하곤 했다. 남편 고세희(75) 은퇴장로와 함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았다. 부부는 “1남 4녀를 업고 걸리며 흙길을 다녔어도 힘든 줄 몰랐다”며 “그 아들이 신앙 안에서 자라 지금은 대학교수(고윤배·49·안산대학 경영학과)가 됐다”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특히 곽 권사는 “하나님 교회 밑에 집을 주시면 더 열심히 섬기겠으니 제발 먼 길 오가는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교회 바로 아래 집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며 “69년 하나님께서 옛 종탑 아래 집을 주시더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열심이었던 부부의 신앙과 성실함은 교회 관련 사진 한 장 허투로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교회사를 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 시절을 산 박영숙(75) 권사. “혼자 예배당 마루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만 붙들고 살았다”며 “너무 힘들게 살아 기억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남양주 퇴계원 태생인 박 권사는 결혼 직후인 1971년 죽산에 정착했다. 시아버지가 이 교회 시무했던 라진교(1965∼1975) 목사이다. 때문에 박 권사 부부는 한때 시아버지와 함께 사택에 살기도 했다. “당시 계단 아래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는데 두 번만 왔다 갔다 하면 힘들어 코피가 날 정도였다”며 “물이 귀해 쌀뜨물을 가라앉힌 맑은 물을 쓸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 권사는 남편이 암투병을 하면서 연단 받았다. 어린 4남매를 기르며 간병하는 날이 계속됐다. “새벽기도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면 기분이 날아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남편은 4남매만 남기고 하늘나라로 갔다. “만화방을 차려 근근이 살림을 꾸리는데 도저히 생계가 안 돼 고민하던 차에 친정어머니가 TV를 한 대 사주셨다”며 “요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TV 수상기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축구 경기라도 할라치면 TV 시청에 10원씩을 받았다”며 옛일을 더듬었다. 만화방을 20년간 했다.



교회 지키며 산 50대, 직분 맡아 이끌어

이들 ‘어머니 세대’의 자식은 이제 어엿한 신앙인이 되어 전통 교회의 후대를 잇고 있다. 죽산에서 나고 자란 모태 신앙의 백옥희(52) 권사는 결혼 전 불신이었던 고융주(58)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장로가 됐다. 이들 외에도 선친의 과수원을 이어받아 농장을 일군 박영각(55) 장로 등이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아 죽산교회를 부흥·성장시켰다.

이제 교회 리더가 된 그들은 그 부모가 그러했듯 성령의 봄바람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있다.



안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