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지킬 수 없는 달콤한 약속은 하지 않겠습니다” 클린·정책 선거… 어른들보다 낫네

입력 2015-03-13 02:34
서울 잠원동 신동초등학교 전교회장 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12일 열린 ‘후보자 토론회’에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급식으로 흰우유 대신 초코우유를 지급하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김모(12)군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지킬 수 없는 달콤한 약속은 하지 않겠습니다.”

12일 오전 9시 서울 서초구 신동초등학교 방송실. 새 학기를 맞아 전교 어린이회장 선거 토론회가 한창이었다. 신동초는 4년 전부터 ‘공약 토론회’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학생들이 직접 선거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후보로 나선 6학년 남학생 6명과 여학생 5명은 각자 2분간 자신의 공약을 발표했다. 이어 다른 후보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모든 과정은 각 교실의 TV로 생중계됐다.

전교생 1500명 중 투표권이 있는 4∼6학년 학생 750여명의 마음을 움직인 남학생과 여학생이 1명씩 한 학기 동안 학교를 대표하는 회장으로 선출된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아직까지 임원선거에 토론 방식을 도입한 학교는 많지 않지만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며 “민주시민을 길러낸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트렌드”라고 말했다.

토론은 치열했다. 하지만 어른 선거에서 흔히 보는 ‘인신공격’은 없었다. 철저히 공약만을 위주로 공방이 벌어졌다. 매니페스토(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따져보고 당선 후에도 공약을 지켜 나가도록 하는 것) 선거인 셈이다.

“월요일마다 등교시간에 음악을 틀어 학생들의 등교를 상쾌하게 만들겠다”는 기호 1번 차모(12)군의 공약이 집중포화를 맞았다. “왜 하필이면 월요일이냐” “일찍 등교해 독서하는 학생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다” “방송반과 협의는 했나” 등의 공격이 들어왔다. 차군은 “주말에 쌓인 피로를 등굣길에 풀 수 있다” “소리를 조절해 운동장에서만 들리게 하겠다” “방송반 친구에게 바로 건의하겠다”고 응수했다. 토론을 지켜보던 학생들 사이에서는 “참신한 아이디어”라는 반응과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화장실에 휴지와 비누를 배치하고,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개방하겠다는 ‘정책 발표’가 이어졌다. 여자 기호 2번 주모(12)양은 “아이들이 깐깐해서 실천 가능한 약속인지 당선을 위한 거짓인지 바로 안다”며 “어른들처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면 바로 떨어지는 게 초등학교 선거”라고 말했다.

선거 방식도 치밀했다. 6학년생 18명이 자원해 선거관리위원이 됐다. 부정·부패·뇌물 선거가 없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학부모가 개입하는지 감시하기도 했다. 오전 10시30분부터 학교 강당에서 진행된 투표는 선관위원 감시 아래 이뤄졌다. 투표용지를 나눠주고, 유권자가 맞는지 명부를 보며 검사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박모(12)군에게 “누굴 찍었냐”고 묻자 박군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투표는 비밀이에요.”

오후 3시 승자가 가려졌다. 이록(12)군과 김윤서(12)양이 각각 269표, 222표를 얻어 회장에 당선됐다. 이군은 자신의 공약에 따라 당장 화장실에 비누를 비치하기로 했다. “약속은 지켜야죠.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대표로서 한 입으로 두 말 하면 안 되잖아요.” 얼마나 많은 돈이 오갔는지 가늠키도 어려운 지난 11일 전국동시조합장선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