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을 경계한다. 독자적인 사고를 하지 못할 염려 때문이다. 실제로 지나친 독서는 정신의 탄력성이나 창조성을 뺏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책을 많이 읽을수록 더 우둔해지고 단조로워진다고 개탄한다.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은 의수나 의족, 의치와 같이 그냥 어색하게 우리 몸에 붙어 있을 뿐이다. 오직 독창적으로 얻은 지혜와 지식만이 자연스러운 몸의 일부로 느껴진다. 책상머리 바보라는 말도 있듯이 남의 지식만 앵무새처럼 모방하는 것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전도서 기자도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전 12:12)고 탄식한다. 확실히 스스로 깊은 생각과 고뇌 끝에 얻은 지혜와 진리가 힘이 있고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이 쓴 좋은 책을 되도록 많이 읽으라는 충고도 만만치 않다. 정수복은 말한다. “닥치는 대로, 손에 걸리는 대로,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순서와 체계도 없이 책에 빠져들었던 독서 체험을 해보지 않은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작가들은 작품을 쓰기 이전에 남보다 책을 많이 읽는 다독가들이었다.” 오르한 파묵은 눈이 아파오고 온몸의 힘이 빠질 때까지 밤마다 새벽녘까지 책을 읽었다고 한다. 책읽기에 몰입하지 않는 이가 좋은 글쟁이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책을 많이 읽지 말라는 충고나 가능한 많이 읽으라는 제안은 둘 다 옳다. 굳이 양자를 절충한다면 “깊이 생각하고 넓게 읽으라”는 말이 될 것이다. 양서를 폭넓게 읽되 주체적 사고는 명징하고 심오하게 하라는 뜻이다. 두루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좋되, 저자의 생각에 안주하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창조적으로 쓰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저자가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것까지 뚫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제시할 수 있다면 최고의 책읽기가 될 것이다.
다독이 창조적 사고의 장애가 된다고 했던 쇼펜하우어는 글쓰기를 세 종류로 분류한다. 사고하지 않고 글을 쓰는 이들이 있다. 기억이나 추억을 바탕으로, 아니면 남의 책을 이용한 글쓰기인데 이런 부류가 가장 많다. 글을 쓰면서 사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막연히 어떤 주제를 쓰려고 펜을 잡다 보면 써나가는 도중에 생각이 나는 저자들이다. 이 수도 적지 않다. 하지만 먼저 사고한 뒤 집필에 착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에게 글쓰기는 머릿속에 미리 충분히 사고한 내용을 종이에 그대로 옮겨 놓는 작업에 불과하다. 이 세 번째 글쟁이는 짐승들을 우리 안에 가두어 놓은 채 자기 맘대로 사냥하는 몰이사냥꾼과 같다. 사냥감을 겨냥해서 척척 쏘기만 하면 원하는 목표물을 포획하듯이 생각을 거침없이 옮겨 쓰기만 하면 된다. 이런 유형의 저자는 아주 드물며, 세상에 엄청난 영향력과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의 설교는 어떨까? 성경과 주석, 그 밖에 숱한 책들을 읽고 난 후 준비하는 설교도 좋겠지만, 단연 깊은 묵상과 깨달음 끝에 나온 독창적인 설교가 가장 은혜롭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생생한 세상 체험과 골방에 들어가 깊은 기도 끝에 나온 하나님 체험에서 비롯된다.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다고, 오늘의 설교는 넓은 독서나 깊은 각성도 모두 결여된 허언(虛言)으로 그칠 때가 많다.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히 4:12) 말씀이 아주 드문 시대가 되었다.
김흥규 목사 (내리교회)
[시온의 소리-김흥규] 책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설교하기
입력 2015-03-13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