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19세기 말부터 150년 가까이 서민들에게는 대표적인 주거제공 수단이었고, 집주인에게는 효율적인 투자 수단이었던 전세제도가 이제 월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있는 모습이다. 저성장·저금리·저물가 시대가 고착화되면서다.
◇전세 자리 넘보는 월세=4년 전까지만 해도 전세는 전체 주택 임대차 거래 건수 가운데 83%를 차지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이 11일 집계한 결과 2011년 15만8775건의 아파트 전·월세가 거래된 가운데 13만1735건이 전세 물량이었다. 하지만 전세의 입지는 해가 바뀔수록 좁아지고 있다. 2013년에는 77%까지 전세 거래 비중이 떨어졌고, 2014년 10월에는 75%까지 하락했다. 정부의 부동산 경기 활성화 대책으로 전체 주택 거래량이 늘면서 작년 연말에 전세 거래가 급증하기는 했지만 전세의 비중은 76%를 넘기지 못했다.
반면 월세는 기세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모습이다. 2011년 2만7040건에 불과했던 월세 거래는 2012년 2만7717건, 2013년 3만5738건을 기록했고 지난해에는 4만3620건까지 치솟았다.
급기야 지난달에는 서울 아파트 월세 거래 건수가 월간 기록으로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 2월 서울에서는 5252건의 아파트 월세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신고됐다. 1월의 3975건보다 32.1% 늘어난 수치로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11년 1월 이래 가장 많은 건수다.
◇전세보다 싸지는 집값=집주인들이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면서 전세 품귀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아파트 전셋값이 매매가격을 웃도는 기현상까지 속출하고 있다.
사랑방부동산이 국토교통부 실거래가를 분석한 결과 광주 남구 진월동 H아파트(전용면적 85㎡)는 지난 1월 기준 전셋값이 1억2000만원으로 실거래가 1억500만 원보다 1500만원이 비쌌다. 지난해 12월에도 광주 남구 봉선동의 S아파트에서 같은 동 1층에 있는 85㎡짜리 두 채가 각각 전세가 1억5500만원, 매매가 1억5000만원을 기록해 전세·매매가 간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부산에서도 지난해 10월 6300만원에 매매된 진구 전포동의 한 아파트(전용면적 26㎡)가 최근 전세가격이 6500만원으로 신고돼 매매가를 역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부산에서는 아파트 전세가율이 100%에 육박하는 아파트 단지가 3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금정구 남산동의 한 아파트(전용면적 140㎡)의 경우 매매가가 2억8000만원에서 3억원이지만 전세가가 2억6000만원에서 2억9000만원으로 매매가에 육박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전용면적 60㎡ 아파트의 지난해 12월 매매 가격은 1억6900만원에 신고됐다. 이 아파트의 전셋값 최고가는 지난해 10월 등록된 1억7000만원이었다.
사랑방부동산 이건우 팀장은 “교육 환경과 전입 희망자의 전세 선호, 그리고 월세를 받으려는 집주인들의 성향이 겹쳐 생긴 현상”이라며 “이사철이 되면 전세 수요가 더 늘어 가격 역전 현상이 심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 했던 전세=전세는 집값 중 일부를 보증금으로 맡기고 남의 집을 빌려서 거주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거주 형태다. 노무현정부가 2007년 펴낸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에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따른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농촌 인구의 이동 등으로 서울 인구가 늘어나면서 전세제도가 생겨났다’고 적혀 있다. 전세의 역사는 최소 139년이나 된 셈이다.
처음으로 전·월세를 전수 조사한 197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서울 가구 중 38%가 전세, 14%가 월세였다. 1970년대 후반 급격한 압축 경제성장과 함께 집값이 급등하면서 전세 비중도 크게 높아졌다. 집값을 마련하기 힘들었던 서민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돈으로 안정적인 주거지를 구할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은행금리보다 훨씬 높은 월세 부담을 줄일 수 있었고,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는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집주인은 전세로 받은 돈을 활용해 집에 투자했고, 집값이 올라 많은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정부가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89년 전세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자 전세금이 유례없이 폭등하면서 1990년에는 두 달 사이 17명의 세입자가 잇달아 자살하는 등 이른바 ‘전세파동’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외환위기 당시 전세금은 집값 하락과 함께 꺾이는 듯싶었지만 1999년부터 2002년까지 66%나 오르면서 가뜩이나 힘들어진 서민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집주인·세입자 모두 불만…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전세=한국 임대차 주택의 대명사였던 전세는 최근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손해를 보는 족쇄로 전락했다. 집주인은 전세 수익이 예전 같지 않아서 불만이고, 세입자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전세금에 울상이다.
인구 감소로 주택 수요가 줄고 저금리·저물가·저성장 상태가 지속되면서 전세제도는 급격하게 ‘퇴물’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전세금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월세로 전환되는 매물도 늘어났다. 이에 세입자는 계약 기간이 돌아올 때마다 전세금 상승 불안에 떨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전국 평균 집값 대비 전세금 비율은 70% 수준이다. 전세 세입자는 전세금이 향후 최대 30%까지도 오를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매물이 없고, 경쟁이 치열해져 새 전세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졌다.
전세는 금융시장을 왜곡시킨 측면도 많았다. 정부는 세입자를 지원하기 위해 각종 기금과 은행을 통해 전세자금 대출 지원책을 꾸준히 늘렸다. 전세금이 계속 오르자 세입자는 대출을 늘려 전세자금을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출에 실패한 사람은 집에서 나와야 하고, 대출을 받더라도 가계 빚은 계속 늘어나는 구조다. 집주인이나 세입자 둘 중 하나라도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확산될 소지도 높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사실상 제도권 밖에서 굴러왔던 전세제도가 시대 변화에 따라 결국은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김능수 신한은행 부동산팀장은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를 배경으로 한 전세는 사라지고 고정 수입을 확보하는 형태인 월세로 전환되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했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경제 히스토리] 139년 역사 ‘전세’ 밀어낸 ‘월세’… 서민 보금자리 어제와 오늘
입력 2015-03-13 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