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김성녀(65) 예술감독. 혹 "누구지?"하고 잠시 머뭇거릴 이들에게 '마당놀이의 여왕'이라고 하면 "아"라는 탄성이 바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김성녀가 요즘 공연계의 또 다른 대세로 자리 잡았다. 국립창극단 작품이 나올 때마다 공연 애호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티켓 예약을 하기에 바쁘다. 창극은 어르신들이나 보는 고리타분한 장르라는 통념도 여지없이 깨졌다. 그가 맡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립창극단 50주년을 맞아 2012년 3월 부임한 김 감독은 새 바람을 일으켰고, 그 결과물인 '장화홍련' '배비장전' '서편제'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다른 춘향' 등은 대한민국 창극사(史)를 새로 썼다. 3년 임기를 마치고 얼마 전 연임이 확정된 김 감독을 지난 9일 서울 중구 창극단에서 만났다. 1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 내내 그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생기찼다.
-‘창극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많다. 스스로 점수를 준다면.
“우선 창극단 단원들이 많이 변했다. 예술감독이 된 후 처음 올린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을 할 때만 해도 단원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이후 다양한 스타일의 창극을 올리다보니 단원들도 이제 어떤 작품이 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언론도 변했다. 그동안 기자들도 창극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공연을 올릴 때마다 바로 보러 오고 리뷰를 쓴다(웃음). 세 번째로 관객이 변했다. 예전에는 나이 드신 분들을 모셔와 객석을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솔직히 유료관객도 거의 없었다. 현재 유료관객이 평균 70% 이상이다. 젊은층도 창극을 보러 온다. 과거 3, 4일 정도했는데 장기공연도 가능해져서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한달을 했다. 물론 3년간 변화는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운도 좋았고 주변 분들이 도와주셔서 가능했다.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A 정도 받아도 되지 않을까.”
-정통적인 창극을 좋아하는 팬들로부터는 창극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장화홍련’을 공연할 때 노인 관객들이 중간에 나가버렸다. ‘이게 무슨 창극이냐’고 비난하신 분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달라진 창극에 환호하는 관객들이 훨씬 많아 매진을 기록했다. ‘이것이 창극이다’로 규정지을 게 아니라 ‘이것도 창극이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장르와 스토리, 주제를 녹여보고 싶다. 국립창극단은 50년간 한결같은 스타일을 선보였지만, 이젠 21세기에 맞는 창극을 만들어야 한다.”
-2기 임기 때도 새로운 창극이 계속 나오나.
“솔직히 너무 지쳐서 3년 더 하라고 했을 때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임기가 연장된 안호상 국립중앙극장 극장장이 함께하자고 설득해 마음을 바꿨다. 앞으로도 다양한 창극을 선보이겠다. 다행히 다양한 장르의 연출자들이 작업을 하고 싶어 해 재밌는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전통적인 창극도 꾸준히 올릴 생각이다. ‘배비장전’ ‘숙영낭자전’ 등 판소리 열두 바탕 가운데 유실된 일곱 바탕을 찾으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심청전’ 등 친숙한 다섯 바탕은 젊은 아티스트들의 눈으로 새롭게 만들어보고 싶다.”
-일부 국공립 예술단체장 선임을 놓고 시끄러웠다.
“언제부터인가 능력보다 편 가르기를 통해 임명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예술단체 발전에 꼭 필요한 인물을 예술감독으로 임명해야 한다. 꼭 그 분야의 대단한 아티스트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행정력, 기획력, 연출력을 갖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감독이 필요하다.”
-30년간 마당놀이를 했는데 어땠나.
“수많은 연극에 출연하고 상을 타도 대중은 나를 ‘마당놀이 배우’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내게 주어진 ‘마당놀이 배우’ 타이틀이 솔직히 창피한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서양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전통예술은 낮게 평가하는 문화사대주의가 있었는데, 나 역시 당시엔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뒤늦게 대학과 대학원에 가서 전통을 공부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우리 전통예술은 결코 서양예술에 앞서면 앞섰지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 다음부터 한결같이 전통을 추구해온 손진책 선생(남편)이 더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마당놀이 배우’에 더욱 긍지를 느끼게 됐다. 지난해 12월 마당놀이 ‘심청이 왔다’를 보면서 중간에 무대 위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바쁜 와중에도 연극 ‘유리 동물원’에 출연하는 등 계속 무대에 서는 이유가 뭔가.
“연기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다. 무대 먼지가 고향처럼 푸근하게 느껴진다. 연기를 해야만 에너지가 생긴다. 배우는 인간 가운데 신의 영역에 다가가는 제사장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감상이 아닌 감동을 주는 올바른 배우가 되려면 앞으로도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관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배우로 남고 싶다.”
-국립창극단 작품에 배우로서 출연할 생각은 없나.
“안드레이 서반 등 연출가들이 역할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소리는 매일 갈고 닦아야 하는데, 안한 지 너무 오래 됐다. 누가 좋은 소리를 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내가 직접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창극단 단원들은 몇 십 년을 죽어라 소리만 한 사람들이다. 2∼3분 정도 괜찮은 소리를 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장르는 무엇인가. 대표작은.
“마당놀이에 가장 애착이 간다. 연극이나 영화, 뮤지컬도 했지만 역할에 따라서는 나보다 잘하는 배우도 많다. 하지만 마당놀이만은 내가 가장 잘하지 않겠나(웃음). 대표작은 2005년 처음 공연해 지금도 무대에 서고 있는 연극 ‘벽 속의 요정’이다. 1인 32역을 하는 모노드라마로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그때 마치 ‘새로운 배우가 나온 것’처럼 주변에서 얘기해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 작품으로 그동안 고생했던 게 뒤늦게나마 보상받은 거 같아 기뻤다.”
한민수 문화체육부장 mshan@kmib.co.kr
[데스크 직격 인터뷰-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창극 안 보던 기자들도 공연 때마다 보러 옵니다”
입력 2015-03-13 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