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체불 사상 최고-임금체불 유형과 실태] ‘열정페이’부터 후려치기형·배째라형까지

입력 2015-03-12 03:01 수정 2015-03-12 09:06

“못 받은 돈 얘기를 꺼내자 상급자들이 막아서며 ‘너는 열정이 없다’고 했어요. 정당하게 받을 돈 달라는 건데도 눈치를 봐야 하는지….”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는 A씨(27·여)는 지난해 성탄절 이후로 한 번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함께 일하는 직원 8명도 마찬가지다. 유명 대학교수이기도 한 소장은 올해 초 “수주한 일거리가 없어 당분간 임금을 못 줄 것 같다”고 통보했다. 임금이 체불되는 동안에도 야근과 주말근무는 계속됐다.

A씨는 최근 저녁식사 자리에서 슬그머니 밀린 임금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비난이었다. 한 선배는 “이 바닥 좁은 걸 모르냐. 조용히 기다리다 정 힘들면 이직이나 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다른 선배는 “이 업계에서 그 정도도 못 참아내면 안 된다”고 A씨를 질타했다. 그러던 중 A씨는 소장이 서울 중심가에 땅을 매입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는 11일 “직원들 월급은 못 주면서 부동산 투자를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면서도 “하지만 건축가로서 내 미래를 생각하면 함부로 신고할 수도 없어 더 절망적”이라고 토로했다.

임금체불의 형태는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A씨처럼 젊은이의 열정을 착취하는 ‘열정페이’는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최저임금도 지켜주지 않는 ‘후려치기’, 법과 규제의 허점을 노려 고의부도를 내는 ‘배째라’ 등 악덕 고용주들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가며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다.

우리 사회의 잦은 임금체불에는 뿌리 깊은 사회적 배경이 있다. 단시간에 거칠게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받는 돈보다 더 많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임금에 대해 정당한 요구를 하면 애사심(愛社心)이 없거나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지난해에만 근로자 29만여명이 임금 1조3195억원을 받지 못했다. 당국에 신고된 액수만 그렇다.

◇업계 관행 내세운 상습 체불…‘후려치기’=초과근무수당을 주지 않거나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주는 등의 일명 ‘후려치기’는 가장 흔한 임금체불 유형이다. 패션, 디자인, 건축 등 도제식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업체가 많은 분야에서 유독 이런 식의 임금체불이 잦다. 업주들은 흔히 “업계의 오랜 관행”이라고 변명한다.

B씨(27)는 지난해 12월부터 지난달까지 여성의류 디자이너 사무실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했다. 매일 꼬박 12시간 넘게 일했지만 월급은 40만원이었다. 최저임금(시급 5580원)을 적용했을 때 받아야 할 임금인 147만3120원에 턱없이 모자란다. ‘가르침’을 빙자한 노동착취였다. 패션업계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고용주인 디자이너에게 아무런 불평도 하지 못하고 두 달 만에 조용히 회사를 떠났다. 그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앞으로 패션업계에서 계속 일하려면 업주에게 항의할 수가 없다. 사회경험을 한 셈 치면 된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패션노조 관계자는 “도제식 시스템에서는 업주가 ‘내 미래’를 쥐고 있는 셈”이라며 “근로자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데는 이런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습 체불에 조직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패션노조는 결국 ‘떼인 돈과의 전쟁’에 나섰다. 지난달 11일부터 알바노조·청년유니온과 함께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캠페인을 시작했다. 패션노조 관계자는 “떼인 돈뿐 아니라 떼인 열정과 권리를 찾는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고의 부도, 차라리 벌금…‘배째라’=법규에 밝은 일부 업주는 고의로 부도를 내거나 체불 임금을 주는 대신 벌금 납부를 선택하기도 한다. 임금체불에 따른 처벌이나 규제가 솜방망이라는 점을 노린 꼼수다.

C씨는 지난해 말까지 서울 성북구 봉제공장에서 1년을 꼬박 일하는 동안 9개월치 임금을 못 받았다. 업주는 “곧 큰돈이 풀리니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말만 믿고 좁은 방에서 하루에 여덟 시간씩 미싱을 돌렸지만 돈은 끝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C씨가 항의하자 업주는 태도가 바뀌었다. “나라에 벌금 내는 한이 있어도 너한테는 돈을 못 주겠다”고 했다. 임금을 체불할 경우 사업주를 3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지만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다. 2013년 상습적 임금체불로 명단이 공개된 사업주 498명 가운데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8명뿐이었다. C씨는 민사소송까지 고민하고 있지만 소송에 비용이 드는 데다 기간이 오래 걸리고, 업주가 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놓았을 경우 해법이 없어 냉가슴만 앓고 있다.

금방 생겼다 사라지는 벤처기업이 많은 IT업계도 임금체불이 심각하다. 임금체불로 신고되거나 차압이 들어오면 아예 회사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폐업하고 다른 회사를 차리는 게 어렵지 않아서다. 회사 문을 닫는 동안 소속 근로자들을 다른 업체에 하도급 형태로 파견해 수수료를 챙기기도 한다.

IT산업노조 나경훈 사무국장은 “IT업계는 공공기관·대기업 발주 사업을 수주한 업체가 필요한 인력을 다시 발주하는 재하청이 많다”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중간의 한 회사가 임금 지급을 미루면 그 밑에 회사들도 줄줄이 체불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정부경 양민철 기자 vic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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