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형섭 (15) 에볼라 국가비상사태에도 “현지인과 고통 함께”

입력 2015-03-13 02:39
조형섭 선교사는 밀알복지재단 후원으로 라이베리아 27개 마을에 의약품, 쌀, 분유를 지원했다. 지원 물품을 받고 기뻐하는 어린이들의 모습.

학교 공사가 90% 정도 진행됐을 즈음 에볼라 바이러스가 라이베리아를 강타했다. 백신과 치료약이 없는 상태에서 에볼라 희생자들이 늘어나자 라이베리아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지난해 7월 인근 국가의 국경이 폐쇄되고 항공사들도 속속 라이베리아 운행을 중단했다. 나는 선교센터와 밀알복지재단 직원을 한국과 케냐로 출국하도록 지시했다. 다만 우리 부부는 라이베리아에 남아 학교 건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내전 당시에도 교회 건축을 했던 내가 에볼라로 학교 건축을 중단한다는 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2개월쯤 지나자 에볼라 환자 발생률이 점차 줄었다. 국외로 피신했던 라이베리아 국민들도 서서히 돌아왔고 라이베리아 정부도 업무 정상 복귀를 공표해 이제 에볼라의 악몽에서 벗어난 듯했다. 우리 역시 에볼라 바이러스가 종식된 줄 알고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까. 다시 에볼라에 대한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속수무책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를 접하니 더 이상 한국에서 편안히 지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먼저 라이베리아에 다시 들어온 선교센터 직원들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금식 기도 후 선교지로 귀임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현지인들이 힘들 때마다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14년간의 내전 속에서도 떠나지 않았던 라이베리아 아니었던가.

라이베리아 사람들이 에볼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단순히 질병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들의 열악한 의료 환경과 영양 결핍이 사태의 본질임을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현지인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영양제를 제공해 에볼라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야만 했다.

하지만 라이베리아로 향하는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프리카 직항 노선이 중단돼 독일과 벨기에를 거쳐 가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했다. 인천공항 출입국사무소를 찾아 라이베리아 입국이 금지됐는지 물으니 직원은 “정부가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말리에 거주하는 교민들에게 철수 공문을 내렸지만 국내 출국에 대한 규제는 따로 없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이 됐는지 “현지에서 에볼라에 감염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라이베리아에 무덤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에볼라에 걸린다면 절대 한국에 다시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소속 선교단체와 여행사도 위험하다며 라이베리아 입국을 말렸지만 내 뜻을 꺾지는 못했다. 이튿날 나는 독일과 벨기에를 거쳐 라이베리아로 가는 비행기 표를 발권 받았다.

지난해 10월 나는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를 가족과 눈물로 이별하고 라이베리아로 떠났다. 독일에서 벨기에로 이동해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에볼라로 라이베리아에 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비행기 안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알고 보니 이들은 WHO와 국경없는의사회(MSF) 의료진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에 확산된 에볼라를 잡기 위해 자원해 죽음의 땅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이다. 이들은 ‘에볼라에 감염되면 본국으로 소환하지 않는다’ ‘사망하면 현지에서 장례를 치르되 화장 혹은 매장을 원칙으로 한다’ ‘에볼라가 완전히 퇴치되기까지 의료 활동을 계속한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고 라이베리아에 파견됐다. 이들의 놀라운 인류애와 박애정신에 존경심을 느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