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았을 때 현숙 씨의 위암 병변은 크지 않았다. 복수가 많이 찬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복수 검사와 위내시경 검사 등 필요한 검사 결과 이미 암이 복막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이미 말기 위암인 셈이다.
“위암 자체는 안 크다면서요. 복수 말고는 딴 데 전이도 안 갔다면서요. 항암치료 세 번 맞고 복수도 다 빠졌는데 왜 수술이 안 돼요? 얼마 산다고요? 지금 이렇게 멀쩡한데 그렇게 밖에 못 산다고요? 참 기가 막히네요.”
참 많이도 물었다. 같은 질문을 서너 번씩 했었다. 아마도 좀 더 좋은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얘기를 들려 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너무 젊은 나이라서 안쓰러웠다. 경구 항암제를 먹으면서 설사에 시달리고 하얗던 피부도 검어지고 예뻤던 얼굴은 이젠 누가 봐도 전형적인 암환자의 얼굴이 돼가고 있었다.
어느 날 현숙 씨는 외래에 임산부 옷을 입고 왔다. 복수가 꽤 많이 차서 임산부 옷을 입었다고 한다. 참 지혜롭고 밝은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한약이나 암에 좋다는 무슨 버섯이나 대체식품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현실을 직면하려 했고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 개월 정도의 생존 기간이 보통인 4기 위암환자의 생존 기간을 훨씬 훌쩍 뛰어 넘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비교적 좋은 삶의 질을 유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름휴가 다녀온다는 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자기 대신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한다. 나는 내심 내가 다녀온 후에도 환자가 여전히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워하면서도 하늘나라 가면 나 잘되라고 기도 좀 해달라고. 좋은 의사 되게 잘 좀 보살펴달라고까지 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러죠. 늘 선생님 위해 기도해요’라고 했다.
환자와 이렇게 이런 식으로 가까워질 수도 있는 건가 가끔 새삼스럽게 고맙고 뭉클할 때가 있다. 나는 일부러라도 환자를 사무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감정 표현 많이 안 하려고 하고 많이 친해지려고 안 한다. 지나치게 가까워졌을 때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고 현명한 판단을 하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여의사가 참 쌀쌀맞고 냉정하다는 얘기도 환자들끼리 한다고 그런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데도 결국은 참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다. 가족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가까워진다. 가족에게 못할 얘기도 나누게 된다.
현숙 씨와 나의 마지막 몇 달은 마치 정말 호흡이 잘 맞는 부부처럼 다 같이 결정했다. 참 별로 좋은 결정 내릴 것도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것도 신기할 뿐이다. 인생에서 진정한 절망은 없나 보다. 같이 결정하고 같이 생각해서 힘든 것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같이 걸어가는 것, 종양내과 의사로서 환자와 그렇게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 더구나 좋은 순간이 아닌 이렇게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같이 그렇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큰 선물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너무도 버거운 짐처럼 느껴져 도망치고 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내 짐을 환자들이 같이 나눠 가질 때 나는 의사로서, 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또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윤소영 건국대병원 종양혈액내과 교수
[의사가 만난 암환자] 위암4기 불구 늘 밝았던 그녀, 어려운 순간 함께 걸었던 것은 큰 선물
입력 2015-03-16 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