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노크하면 수줍게 반겨주는 매화, 경남 하동 최참판댁 봄나들이

입력 2015-03-12 03:01
경남 하동 ‘최참판댁’을 찾은 관람객이 별당채 앞 연못을 보며 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영춘화 산수유꽃 등이 봄이 바짝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최참판댁 초가집 세트장에 마련된 물레방아가 고향의 옛 정취를 전해준다.
‘지리산이 뻗어 내린 그 길 위를 파르티잔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걷다 보면…/하동 지나 꽃들이 속삭대는 그 길을 걷다 보면…/강이 살아 숨 쉬는 거기 평사리 있다/봄이면 평사리엔 꽃들 피는데 그것도 무더기로 피어내는데….’

경남 하동 출신 최영욱 시인이 출간한 ‘평사리의 봄밤’에 나오는 구절이다. 평사리는 고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다. 선생은 섬진강과 지리산이 어우러진 평사리를 무대로 대작 ‘토지’의 이야기를 실처럼 풀어냈다. 대지주 최씨 가문의 4대에 걸친 비극적 사건을 다루면서 개인사와 가족사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 풍속, 사회사를 모두 담았다.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 봄꽃이 정갈하게 핀 ‘최참판댁’을 찾아 나섰다.

하동읍에서 차로 10여분 달리면 닿는 악양면 평사리는 거대한 지리산 산덩이가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 자리잡아 만석지기를 능히 낼만한 확 터진 들판이다. 경지 정리가 잘 된 들판은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260만㎡(83만평) 들판 한복판에는 ‘토지’의 서희와 길상처럼 애틋한 그리움을 품은 소나무 한 쌍이 서 있다. 부부송이다. 봄마다 청보리의 초록융단을, 가을엔 황금물결의 풍요로움을 지켜봤을 이 소나무는 아직 푸르른 봄빛을 제대로 품지 못한 들판에서 우뚝하다.

부부송을 지나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지나다 당나라 악양의 ‘동정호’와 흡사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동정호를 만날 수 있다. 동정호를 벗어나 최참판댁 입구 삼거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올라서면 최참판댁에 발길이 닿는다. 악양들과 섬진강 물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배기에는 초가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언덕 중턱에는 고랫등 같은 기와집이 덩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소설 ‘토지’의 장엄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상의 건물을 새로 지은 곳이다. 총 9529㎡부지에 들어선 최참판댁은 조선후기 반가(班家)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별당과 안채, 사랑채, 문간채, 중문채, 행랑채, 사당 등이 일자형으로 이뤄져 있다.

매화가 수줍게 피어 있는 앞마당을 지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에서 칼칼한 최치수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뒤돌아보면 들판의 풍경이 한 폭의 병풍그림처럼 솟을대문에 걸린다.

윤씨 부인과 서희가 기거했던 안채에서는 금방이라도 치맛자락을 휘날리는 서희 아씨가 나올 듯하다. 툇마루에는 따스한 햇살이 달려들어 봄빛으로 반짝인다. 사랑채와 뒤채 사이 담장에는 영춘화(迎春花)가 앙증맞게 노란 꽃망울을 열어 봄을 맞으라고 재촉한다. 향기가 없는 점이 아쉽지만 이미 봄기운이 흥건하다. 대나무숲을 지나 초당에 닿으면 산수유 꽃 사이로 최참판댁을 내려다볼 수 있다.

최참판댁 아래엔 용이네, 봉기네, 이평이네 등 초가집으로 이뤄진 TV드라마 ‘토지’의 촬영 세트장이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봄볕 따스한 돌담 고샅길을 걸으면 옛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최참판댁 뒤로는 이곳 지명을 딴 평사리문학관이 자리한다. 박경리 선생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비치돼 있다. 시대적 배경을 비롯한 당대의 풍습 등도 일목요연하게 기록돼 있다. 매년 청소년 백일장과 문학제, 체험 프로그램이 알차게 꾸려진다. 문학관 뒤편에는 창작실이 있어 문인들이 상주하며 작품 창작도 할 수 있다. 느림의 미학이 살아 꿈틀대는 악양면은 2009년 이탈리아 슬로시티 국제조정이사회에서 국내 5번째 슬로시티로 인정받았다.

최참판댁에서 가까운 곳에 화개장터가 있다. 섬진강 물길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해 경상도와 전라도 주민들이 5일마다 열리는 화개장에서 내륙에서 생산되는 임산물과 농산물, 남해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등을 바꾸거나 사고팔았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빨치산 토벌 등으로 지리산 자락 마을들이 황폐해지고 교통과 유통구조가 발달되면서 쇠퇴했다. 하동군은 옛날 화개장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2001년 특산품을 파는 현대식 시장으로 꾸몄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말 불에 탄 일부 건물의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한옥 구조의 야외장옥 등을 갖추고 화개장터 벚꽃축제 첫날인 다음달 3일 재개장한다.

하동=글·사진 남호철 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