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역시 거침없었다. 그는 9일 7년만의 방일에서 일본의 아킬레스건인 과거사 문제를 직설적으로 거론하며 일본의 진정한 과거 반성과 주변국과의 화해 노력을 촉구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기자회견에서도 그런 입장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올해 6월 독일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의 사전준비 차원에서 마련된 방문이지만 메르켈 총리는 주요 행사장에 갈 때마다 과거사 문제를 꺼내들었다.
메르켈 총리는 도쿄 도착 직후 아사히신문 주최로 신문사 내 하마리큐 아사히홀에서 개최된 강연에서 “나치 학살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끄러운 과거와 정면으로(squarely) 마주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고 일본 현지 언론과 AP, dpa통신 등이 보도했다.
메르켈 총리는 일본이 한국 및 중국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은 (일본이)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이라면서 “이웃 나라와 화해하고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메르켈 총리는 구체적으로 “독일이 관계가 나빴던 프랑스, 유럽 여러 나라와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 과거를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메르켈 총리는 “(이 과정에서) 프랑스도 관용을 베풀었다”면서 한국과 중국에도 너그러운 태도를 주문했다.
메르켈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과거사에 관한 아베 총리의 반성 없는 태도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도쿄 총리관저에서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개최된 공동기자회견에서도 “과거 정리는 (전쟁 가해국과 피해국 간) 화해를 위한 전제”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독일이 2차 대전의 과오를 정리할 수 있었기에 훗날 유럽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일에서는 나치가 저지른 무서운 죄악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면서 일본 스스로 과거 청산을 위한 내부 논의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과거사 반성 전도사’인 메르켈 총리의 이번 언급으로 일본이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전향적으로 나설지 주목된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메르켈 총리가 방일 첫날에 그동안 아베 총리를 향해 과거사 반성을 꾸준히 주문해온 아사히신문 주최 강연장에 선 것 자체가 ‘무언의 압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아사히신문은 일본군 위안부 보도 등과 관련해 아베 총리가 소속된 자민당과 우익의 협박에 시달려 왔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취임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과거사를 반성해 왔다. 지난 1월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도 “나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항구적인 책임”이라며 ‘영원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7년 9월 유엔총회서도 국제사회를 상대로 사과했고, 이듬해 3월에는 이스라엘 의회 연설에서 “쇼아(재앙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독일인에게 가장 큰 수치”라고 공개 사죄했다.
메르켈 총리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을 예방한 자리에서도 과거사 문제를 거론했을 것으로 관측됐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1월 2일 신년사에서 “전쟁의 역사를 바로 배워야 한다”며 아베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발언을 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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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3-10 02:23 수정 2015-03-10 0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