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9월 9일,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완역된 신약성서를 봉헌했다. 아펜젤러는 1900년 초 안식년을 맞기로 했으나 성서 번역 이후로 미뤄 그해 9월 28일,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안식년을 맞이했다. 그가 미국 뉴욕으로 귀국할 때 선택한 경로는 일본 나가사키, 중국 상하이, 홍콩, 인도 실론, 아테네, 홍해, 이집트 수에즈, 나폴리, 로마, 스위스, 런던을 거쳤다. 그는 여행지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줄곧 한국의 정동제일교회 예배를 상기하며 “내 마음은 언제나 한국의 예배를 그리워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가는 곳 마다 ‘배재학교 교장’이라는 글자가 찍힌 명함을 주었다. 어쩌면 가족들과의 마지막 여행을 통해 자신이 도착해야 될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보면서도 정동제일교회의 따뜻한 예배당을 그리워했다.
안식년 중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했던 선교보고를 보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말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한국 스타일로 연설하겠다며 서론을 거두절미했고 바로 한국의 자연환경과 문화를 설명했다. 그는 설교에서 “선교활동에 임하면서 한 번도 예수, 그 이름을 고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라며 고백했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많은 분들이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라”고 호소했다.
아펜젤러의 순직 과정
두 번째 안식년을 마친 그는 평상시와 달리 자녀들의 교육 문제로 가족을 두고 와야 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02년 5월 16일 무어 감독과 함께 평양에서 열리는 선교회에 참석한다. 여기서 아펜젤러는 남한 지역의 감리사로 임명되어 선교 전반을 맡게 됐다. 그 날은 그와 동행하면서 선교 사역을 도와주었던 정동교회 최병헌이 목사 안수를 받는 날이었다. 한국인 목회자가 배출돼 본격적인 한국 기독교가 정착되고 꽃이 피어나는 무렵 아펜젤러에게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1902년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 선점을 두고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아펜젤러는 무어 감독과 함께 서울 근교의 무치내교회로 가는 도중이었다. 일행이 경부선 철길을 가로지르려 할 때 철로에서 일하던 일본인 하나가 길을 막고 시비를 걸었다. 아펜젤러는 양해를 구하고 지나치려고 했으나 일본인은 아펜젤러와 무어 일행을 러시아 사람으로 오해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미국 공사관에서는 일본 당국에 항의했고 이 사건 증인으로 아펜젤러가 출두하게 된다. 우연한 사고였지만 결국 6월 첫 주일 목포에서 만나기로 한 성서번역위원회 모임에 차질이 생겨 며칠 늦게 출발했다.
6월 11일 정오 아펜젤러는 오사카상선회사 소속 구마가와마루(球磨川丸)라는 배에 그의 조사 조한규, 목포 집에 내려가는 여학생과 함께 타게 된다. 여기에 보울비라는 미국인도 함께 타는데 보울비는 운산금광에 있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구마가와마루의 항해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맑은 날씨 가운데 해상 상태도 잔잔했다.
밤이 깊어졌고 밤 11시쯤 맞은편에 배 한 대가 오고 있었다.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였다. 기소가와마루는 아펜젤러가 탄 배를 발견하고 기적을 울렸으나 그대로 아펜젤러가 탄 배의 우측을 쓸면서 충돌했다.
구로다 선장은 3등 항해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수면 중이었으나 아수라장이 되자 기소가와마루로 몸을 던지며 자신의 배에서 제일 먼저 탈출한다. 선장이 없는 배는 순식간에 바다로 빨려 들어갔다. 배에 탄 승객도 마찬가지였다. 아펜젤러가 탄 배는 46명의 승객 중 18명이 행방불명 됐다. 안타깝게도 아펜젤러도 그 행방불명 명단에 포함됐다. 미국인 아펜젤러와 보울비 중 보울비만 침몰 전에 바다로 뛰어 들었다.
침몰하지 않고 생존했던 기소가와마루의 선원들은 너무 오래 꾸물댔다. 물속에서 살려달라는 사람들의 외침에도 20분을 지체하고서야 구조선을 내렸고 조난자 대부분 조류에 쓸려간 뒤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도 기상 탓을 하며 3시간만 구조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당시 친일 미국인 그리피스는 기소가와마루의 선원들이 헌신적으로 구조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미화된 표현으로 그리피스의 친일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펜젤러 가문에 남겨진 슬픔
보울비를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이 구조가 되었음에도 기소가와마루 선원들의 불친절에 두 번 좌절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어떻게 보면 아펜젤러의 순직은 불가피하게 사고가 났던 자연재해라고 생각 할 수 있으나 인재에 의한 사고가 확실하다. 그의 시신은 수습도 불가했고 차디찬 바다 가운데 떠내려갔다. 애석하게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까지 아펜젤러의 생애를 놓고 볼 때 배에서 탈출 할 수 있었던 2∼3분간의 골든타임을 자신의 생명을 위해 쓰지 않고 한국인을 구조하기 위해 다시 배안으로 들어갔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펜젤러의 사망 소식은 한국 기독교 전체를 통탄에 빠뜨렸다. 그의 빈자리는 너무 커 애도의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가장 비통에 잠겼던 이들은 가족들과 한국의 교인들이었다. 비보는 그들 삶을 힘들게 했다. 유족들은 오사카 상선회사를 상대로 7년간 소송을 치렀다. 그러나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 카츠라-태프트 조약으로 제국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터무니없는 소액 배상만 이뤄져 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7) 아펜젤러의 순직
입력 2015-03-10 02:48 수정 2015-03-10 1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