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좌절감 주는 미국의 역사인식

입력 2015-03-09 02:20

매주 금요일 워싱턴포스트(WP) 인터넷판에는 ‘최악의 일주일을 보낸 워싱턴 인물(Who had the worst week in Washington)’이라는 칼럼이 실린다. WP의 정치 전문기자 크리스 실리자가 쓰는 이 칼럼이 ‘최악의 일주일을 보낸 외교관’으로 범위를 좁힌다면 이번 주에는 아마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선정됐을 것이다.

셔먼 차관은 지난달 27일 한 싱크탱크에서 한 연설을 통해 ‘과거사 문제에 한·중·일 모두 책임 있다’는 식의 양비론을 드러내면서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미국 외교관으로 각인됐다. 유감스럽게도 아주 나쁜 의미에서.

국무부 관계자들은 파장이 이렇게 커질 줄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셔먼 차관 연설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대목은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하면서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런 ‘도발적인 행동’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할 뿐”이라는 대목이었다. 이에 대해 한 국무부 인사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한국 대통령 등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이 결코 아니다. 과거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것은 일본 역대 총리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정치인들의 행태를 지적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설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일본 대 한국·중국으로 범주를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던 중에 나온 대목이어서 문맥상 아무래도 한국과 중국 지도자를 염두에 둔 것 같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국무부로서는 ‘말실수’라거나 ‘비판자들이 거두절미하고 의미를 왜곡한다’고 부인하기 어려워 훨씬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셔먼 차관의 문제 발언은 일문일답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원고에 있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국무부의 외부 연설 원고는 최소한 2주 전부터 관련 부서 등을 거치며 수차례 검증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원고도 당연히 동아태국 등 국무부 직원과 간부들의 의견이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이번 연설이 셔먼 차관의 개인 의견이라기보다 국무부 전반의 한·중·일 역사 문제를 보는 시각을 드러냈다는 말이 나오는 연유다.

셔먼 차관의 연설 원고에서 드러나는 국무부의 기본적 정서는 한·중·일 역사 갈등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로 인한 ‘좌절감’이다. 특히 동맹인 한국과 일본 간 길어지는 관계 악화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녹아 있다는 인상이다. 이는 ‘고집쟁이’ 박근혜 대통령으로 인해 동아시아 역사 문제에 대해 미국의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를 퍼뜨려온 일본의 주장이 먹혀들고 있는 증거로도 해석된다.

이번 사건은 또한 ‘물샐 틈 없는’ ‘더 이상 좋을 순 없는’ 등의 수식어로 자화자찬해온 한·미 관계에 대한 우리 정부의 냉철한 반성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우리에게는 ‘광복 70주년’, 일반적으로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인 올해가 진지한 성찰 대신 침략국 일본 주도의 ‘미래를 보자’는 팡파르 요란한 현실왜곡의 장으로 변질될 전조 같아 불안하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이미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명예’를 사실상 손에 넣은 상태다. 주도권을 가져야 할 남북관계에서조차 미국과 한 치 어긋나지 않는 보조를 맞추는 데 온통 신경을 쓰는 현실에서 우리 외교당국이 가진 ‘레버리지(지렛대)’가 뭔지 궁금해진다.

인류 보편적 인권이 걸린 위안부 문제에서도 가해자 일본의 입장이 미국 조야에 먹혀드는 현실은 우리 대미 외교의 위태로운 처지를 보여준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