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첫 작품을 보고 누가 재질이 종이라고 눈치 챌까. 광택이 나는 까맣고 얇은 알루미늄 포일이 군데군데 찢어진 것일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원로작가 최병소(71)의 힘은 종이가 갖는 물성을 완전히 전환시킨데 있다. 신문지에 연필과 볼펜을 긋고 또 긋는 반복적인 행위는 이렇듯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신문지 여백을 조금 남긴 작품을 보고나서야 원 재질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만나는 최 작가의 작품세계는 그가 1970년대부터 추구해온 것이다. 26일까지 선보이는 20여점에는 신작도 있지만 73년 독서신문에 한 작업을 재현한 것도 있다.
신문지 작업은 헐벗었던 현대사의 산물이다. 6·25전쟁으로 모든 산업생산시설이 초토화됐고 인쇄소와 제본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과서는 유네스코가 지원한 신문용지에 인쇄해 배부됐다. 제본이 안돼 교사가 바늘로 꿰매 학생들에게 나눠줬던 시절이다.
중앙대 서양화과를 나와 실험미술에 참여했던 그는 헤지고 찢겨졌던 어릴 적 신문용지 교과서를 기억에서 불러냈다. 볼펜과 연필로 무심히 글자를 지우는 ‘신문지우기’ 작업은 당시 언론탄압과 신문검열을 했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연필심의 광물질(흑연)이 내는 검은 광택은 단색화를 연상시키지만, 그의 작품은 연필과 볼펜 등 일상의 오브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실험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생 반복해온 작업이 지루하지 않았을까. 80년대 잠시 외도 했으나 90년대 회귀했다는 작가는 “이 때의 지우기는 저항의 행위가 아니라 ‘나를 지우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1, 2년 한 엉덩이를 붙이고 지우고 또 지우는 그 구도적 행위로서의 작업은 종이를 3차원의 입체적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길이 7m, 15m의 거대한 작품 2점이 지하 전시실에 긴 천을 늘어뜨리듯 설치돼 있다. 딱 2점만으로 전시장이 꽉 찬 듯해 물성의 전환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경탄하게 된다(02-541-5701).
손영옥 선임기자
신문지야? 얇은 철판이야?… 아라리오갤러리 최병소 개인전
입력 2015-03-09 0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