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 있다 보면 힘든 상황을 자주 접한다. 생활환경 자체도 열악하지만 의료시설이 낙후돼 고통 받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 현지인뿐 아니라 나 역시 현대의학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질병으로 생사를 오간 기억이 꽤 있다.
내전 중이던 어느 날 일이다.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아내는 맹장염 같다며 당장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단순한 배탈일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전 상황에선 어떤 병원에 가도 의료시설이나 의약품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심한 오한에 시달렸다. 온몸에 힘이 없었고 정신이 혼미했다. ‘맹장염인지 아닌지만 확인해보자’는 아내의 설득에 못 이긴 나는 비몽사몽간 현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말라리아 검사만 한 뒤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내는 백혈구 수치도 확인해야 한다며 의사를 다그쳤다. 아내의 끈질긴 요청 덕에 검사해 보니 백혈구 수치가 정상이 아니었다. 검사 결과나 증상으로 봤을 때 맹장염이 분명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검진한 의사에게 당장 수술하자고 애걸하니 수술 담당 의사가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백혈구 수치 결과표 한 장 받아들고 다른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결과표만 쓱 보더니 나를 바로 수술실로 옮겼다. 혼미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때 의사가 바로 맹장 수술을 하겠다고 말했다.
피 검사나 엑스선 촬영 등 추가 검사 없이 바로 수술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아내는 두 시간 정도 수술할 거라 예상하고 집에 가서 입원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수술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 의사는 황급히 찾아온 아내에게 수술이 완벽하게 잘 됐다며 떼어낸 맹장을 보여줬다.
수술 사흘 후 현지인 의사 지시대로 퇴원했는데 1주일 뒤 문제가 생겼다. 수술 부위에서 고름이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복부가 합판처럼 단단해졌다. 아내는 복막염 같다며 병원에서 재수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전 중의 병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병원 말고 집에서 죽겠다며 고집을 부리자 아내는 약국을 전전하며 항생제를 구해왔다. 아내가 밤낮으로 정성껏 치료한 덕에 점차 고름이 줄어 1주일 만에 다 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소독도 하지 않은 수술 도구로, 괴사돼 다 터진 맹장만 꺼냈는데도 살아남은 건 정말 기적이다. 라이베리아에 나를 보낸 하나님께서 남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생명을 허락해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전기와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현지 사정상 우리는 하루에 2∼3시간씩 자가발전기를 가동해 땅 속 물탱크에 저장한 빗물을 사용하곤 했다. 우리는 20년간 사용한 노후 자가발전기가 고장나지 않도록 조심히 썼다. 그러다 사고가 생겼다. 노후 발전기에서 샌 기름을 밟고 미끄러져 왼손 약지를 다친 것이다.
현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일시 귀국해 뼈를 이식했지만 수술 후 건축 공사에 참여하는 등 손을 무리하게 사용해 손가락 속 고정핀이 부러졌다. 최근 한국에서 재수술을 했지만 지금도 왼손 약지에 붕대를 감은 채 살고 있다.
한국이라면 결코 죽지 않을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 라이베리아에 제대로 된 병원이 세워져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고난을 덜어주는 날이 하루속히 오길 소망한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조형섭 (11) 의료시설 낙후 의약품도 없어… 오직 주님만 의지
입력 2015-03-09 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