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형섭 (11) 의료시설 낙후 의약품도 없어… 오직 주님만 의지

입력 2015-03-09 02:37
라이베리아 오지 마을 학교 건립을 위해 다친 손으로 공사를 계속하는 조형섭 선교사.

선교지에 있다 보면 힘든 상황을 자주 접한다. 생활환경 자체도 열악하지만 의료시설이 낙후돼 고통 받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 현지인뿐 아니라 나 역시 현대의학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질병으로 생사를 오간 기억이 꽤 있다.

내전 중이던 어느 날 일이다.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아내는 맹장염 같다며 당장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단순한 배탈일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전 상황에선 어떤 병원에 가도 의료시설이나 의약품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심한 오한에 시달렸다. 온몸에 힘이 없었고 정신이 혼미했다. ‘맹장염인지 아닌지만 확인해보자’는 아내의 설득에 못 이긴 나는 비몽사몽간 현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말라리아 검사만 한 뒤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내는 백혈구 수치도 확인해야 한다며 의사를 다그쳤다. 아내의 끈질긴 요청 덕에 검사해 보니 백혈구 수치가 정상이 아니었다. 검사 결과나 증상으로 봤을 때 맹장염이 분명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검진한 의사에게 당장 수술하자고 애걸하니 수술 담당 의사가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백혈구 수치 결과표 한 장 받아들고 다른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결과표만 쓱 보더니 나를 바로 수술실로 옮겼다. 혼미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때 의사가 바로 맹장 수술을 하겠다고 말했다.

피 검사나 엑스선 촬영 등 추가 검사 없이 바로 수술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아내는 두 시간 정도 수술할 거라 예상하고 집에 가서 입원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수술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 의사는 황급히 찾아온 아내에게 수술이 완벽하게 잘 됐다며 떼어낸 맹장을 보여줬다.

수술 사흘 후 현지인 의사 지시대로 퇴원했는데 1주일 뒤 문제가 생겼다. 수술 부위에서 고름이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복부가 합판처럼 단단해졌다. 아내는 복막염 같다며 병원에서 재수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전 중의 병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병원 말고 집에서 죽겠다며 고집을 부리자 아내는 약국을 전전하며 항생제를 구해왔다. 아내가 밤낮으로 정성껏 치료한 덕에 점차 고름이 줄어 1주일 만에 다 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소독도 하지 않은 수술 도구로, 괴사돼 다 터진 맹장만 꺼냈는데도 살아남은 건 정말 기적이다. 라이베리아에 나를 보낸 하나님께서 남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생명을 허락해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전기와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현지 사정상 우리는 하루에 2∼3시간씩 자가발전기를 가동해 땅 속 물탱크에 저장한 빗물을 사용하곤 했다. 우리는 20년간 사용한 노후 자가발전기가 고장나지 않도록 조심히 썼다. 그러다 사고가 생겼다. 노후 발전기에서 샌 기름을 밟고 미끄러져 왼손 약지를 다친 것이다.

현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일시 귀국해 뼈를 이식했지만 수술 후 건축 공사에 참여하는 등 손을 무리하게 사용해 손가락 속 고정핀이 부러졌다. 최근 한국에서 재수술을 했지만 지금도 왼손 약지에 붕대를 감은 채 살고 있다.

한국이라면 결코 죽지 않을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 라이베리아에 제대로 된 병원이 세워져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고난을 덜어주는 날이 하루속히 오길 소망한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