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 탕!”
열 살가량 된 소년병들은 언제나 제일 앞에서 자신의 키만한 총을 들고 목표물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초점을 잃은 눈빛에서는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반군에게 붙잡힌 아이들은 맨 앞에서 가장 먼저 쓰러지는 총알받이로 희생됐다. 반군들은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에게 ‘총알이 피해가는 약’이라며 마약을 먹였다. 마약에 중독된 소년병 대다수는 내전 중에 팔과 다리가 잘리거나 목숨을 잃었다. 요행히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소년병들은 소강상태 때마다 도시에서 구걸하며 노숙생활을 했다.
“이 어린 것들이 할 수 있는 게 구걸이나 총질밖에 없다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14년 내전 동안 라이베리아 국민 35% 이상이 희생됐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에 중독됐고 고아가 돼 거리에 방치됐다. 나는 가족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며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숨지는 아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해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도했다. 이들을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교육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야말로 아이들의 미래를 설계하고 라이베리아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선교센터로 불렀다. 순식간에 250명 정도가 모였다. 1996년 선교센터의 한 공간을 학교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학교 이름은 ‘코리안 라이베리안 스쿨(Korean Liberian School)’로 정했다.
우리 부부는 알파벳과 숫자부터 가르쳤다. 학교에 지붕도 없었고 교과서 공책 등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벽에 검정색 페인트를 칠해서 칠판으로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인근 기니에 가 칠판과 분필을 구했다. 책걸상을 마련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들은 돌멩이나 벽돌을 가져와 쪼그려 앉아 공부했다. 배움을 향한 아이들의 열의는 뜨거워 공사 중인 공간에도 3∼4개 반의 수업이 함께 진행됐다.
하지만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두 맨발로 학교에 와 허기진 배를 달래며 공부했다. 내전 기간 모든 학교가 문을 닫아 스무 살 엄마와 다섯 살 자녀가 손잡고 학교에 오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5학년 교실, 딸은 유치원 교실에서 공부했다. 자녀가 있는 중학생들도 많았다. 열일곱 살 청소년이 2학년 교실에서 한참 어린 동생들과 수업을 듣기도 했다.
라이베리아 상황이 점차 안정되면서 교사에게 월급도 주고 학생에게 학비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교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생활비를 쪼개 교사의 양적·질적 향상을 위해 제자들을 교사 훈련원에 보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지 28년. 라이베리아 어딜 가도 제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어느새 30∼40대가 돼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했다.
우리는 ‘코리안 라이베리안 스쿨’을 시작으로 라위스, 크로존타운, 로파 포야 등 10개 지역에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를 거친 라이베리아인은 2000여명에 달한다. 제자들은 나를 ‘파더(아버지)’라 부른다. 정말 이들은 내가 가슴으로 낳은 자녀들이다. 이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오래 살면서 우리를 계속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교통사고를 선교의 기회로 바꾸신 하나님께서는 내전으로 상처 입은 땅에 복음과 교육을 전해 라이베리아 미래를 바꾸는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조형섭 (7) 14년 내전 최대 피해자 아이들 위해 학교 설립
입력 2015-03-03 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