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직원 김모(28)씨는 주말마다 독일어 학원에 간다. "자기계발이 아니라 탈출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목고와 명문대를 졸업하고 취업 관문까지 통과하며 탄탄대로를 걸어온 터였다. 그런데 지금 손에 쥔 모든 걸 버리고 독일로 떠날 꿈을 꾼다. 거기서 자리 잡고 배우자를 찾아 가정을 꾸릴 생각이라고 했다.
몇 해 전 핀란드인과 결혼해 핀란드의 작은 도시로 이주한 A씨(32·여)의 블로그는 국내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현지 언어를 배우는 과정, 맛집과 각종 축제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올렸다. 북유럽 이주를 희망하는 젊은 네티즌들이 댓글로 “어떻게 핀란드인과 결혼했느냐”며 사생활까지 캐묻는 통에 한참을 시달리다 얼마 전 블로그를 폐쇄했다.
국제결혼의 트렌드가 확 달라졌다. 그동안 대세는 국내에서 신부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 여성과 혼인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혼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국제결혼 건수는 빠르게 줄고 있다. 하지만 미국 유럽 등 선진국 배우자와의 결혼은 거꾸로 급증했다. 이런 경우 대개 한국을 떠나 배우자의 나라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계획을 가진 김씨는 이를 “탈출”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걸까.
1일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기관과 재외 대사관에 신고되는 한국인 국제결혼 건수는 2005년 4만2356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 2011년 2만9762건, 2013년 2만5963건까지 줄었다. 반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출신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은 2000년 1563명에서 2013년 3280명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도 같은 기간 300명에서 942명으로 늘었다. 2013년에만 4200여명이 선진국 배우자와 가정을 꾸린 것이다.
이들은 복지나 생활수준을 고려해 대개 배우자를 따라 해외로 이주하려 한다. 외국에서의 삶을 꿈꾸는 이들로부터 동경과 관심을 받는 일이 잦다. 미국인 남편과 미국 버지니아로 이주한 A씨(39)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신의 생활상을 주기적으로 올려 인기를 끌고 있다. 빽빽한 아파트단지 대신 자연이 어우러진 창밖 풍경, 회사 술자리 대신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동네 파티, 야근과 주말근무 없는 직장 이야기 등은 수천건씩 조회수를 기록한다. ‘국제연애’ ‘국제결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온라인 카페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과거 국제결혼은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저개발국가 배우자가 한국에 정착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2013년 출입국관리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연소득이 1513만원(2인 가구 기준)보다 적은 사람은 외국인 배우자를 국내로 초청할 수 없게 됐다. 또 우후죽순 난립한 결혼중개업체에 대한 규제도 대폭 강화돼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국제결혼은 어려워진 상황이다. 최연실 상명대 가족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젊은이들은 일찍부터 국제화를 경험해 외국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최근 과열 경쟁 등으로 고달픈 한국을 떠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국제결혼은 더 이상 저소득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고 말했다.
‘고달픈 한국’을 떠나려 한다는 김씨는 28일 “나는 불행했다”며 입을 열었다. 툭하면 철야근무를 해야 했고, 회사의 명성과 달리 월급은 월세를 내면 빠듯한 수준이었다. 사내의 지나치게 경쟁적이며 충성스러운 분위기도 압박으로 다가왔다. 자정이 넘어 8평짜리 원룸에 들어서면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새벽 출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끊임없이 경쟁만 하며 살았는데 평생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데 자괴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의 다음 목표는 이민자에게도 학비가 지원되는 독일에서 대학에 진학해 고전음악사(史)를 배우는 것이다. 김씨는 “남이 좋다고 하는 인생 대신 정말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며 “그래서 현지에서 현지 여성을 만나 결혼할 계획도 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기획] 개도국 배우자 데려오기 → 선진국 배우자 따라가기… 국제결혼 트렌드가 확 바뀌고 있다
입력 2015-03-02 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