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의료제도’ 적극 도입하자

입력 2015-03-02 02:43
환자가 아플 때 내원하지 않고 의료진이 환자에게 방문해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찾아가는 의료제도(일명 왕진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독거노인인 김복순(85·가명) 할머니는 현재 퇴행성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으나 거동이 불편해 혼자 병원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육남매인 자녀들이 있으나 자식들 역시 먹고 살기 바빠 어머니를 돌볼 여력이 없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교대로 홀로 계신 어머니를 인근에 있는 지역병원에 데려다 주고 있다. 김씨는 “자녀들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 통증을 참다가 병이 악화돼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다”며 “간병인 고용이 부담스럽고 병원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나 같은 노인들을 위해 의사들이 찾아와 진료를 해주는 제도가 도입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거동이 힘든 말기 암환자나 노인에게는 잠깐의 진료를 위해 병원을 다녀오는 것이 누구보다도 버겁다. 이를 위해 환자가 아플 때 병원을 찾아가지 않고 의료진이 환자를 방문해 진료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찾아가는 의료제도(일명 왕진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핵가족화 추세에 따라 가족들이 간병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보호자 없는 병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병원 안에서 보호받는 제도여서 불편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한다. 또 정부가 간병비 등 3대 비급여에 대해 단계적으로 환자들의 부담을 줄이겠다고 발표했으나, 현재까지 간병비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 몫이다.

문제는 가족이 있으나 병원을 찾기 어려운 중증질환자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말기 암환자의 10%는 적절한 통증 조절도 받지 못하고 집에서 임종하고 있다. 더불어 노인들 중 상당수는 질병이 악화됐음에도 병원에 제때 들르지 못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허대석(사진)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는 “거동이 힘든 환자가 잠깐의 진료를 위해 앰뷸런스까지 불러서 병원으로 힘겹게 오는 경우를 볼 때마다 안타깝다”며 “이것이 왕진제도의 도입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정책은 대형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기에 적합하게 제도화돼 있다”며 “저소득 계층을 위한 의료복지도 의료기관을 찾았을 때만 이뤄지며, 의료급여 1종 환자는 의료비가 무료지만 의료기관을 찾아오지 않으면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찾아가는 의료제'가 적극 시행되고 있는 국가는 영국이다. 허 교수는 "영국과 같은 왕진제도의 도입으로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많은 분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영국은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국가가 의료를 공급하고 그 재원의 대부분을 세금에 의해서 충당하는 국민보건제도(National Health Service)가 실시되고 있다. 이 제도로 국민은 질병의 치료와 예방, 간병과 간호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돼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에는 '왕진'이라는 특별한 제도가 있다. 영국은 지역 공동체 내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환자와 독거노인들을 의사와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맞춤형 돌봄을 제공하고 있다. 허 교수는 "의사가 일일이 환자의 집을 다니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계산한다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그러나 의사가 환자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생활하는지를 살펴야 환자의 장기적인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왕진' 형태의 진료가 이뤄졌으나 이제는 잊혀져 가는 제도가 됐다. 과연 이 제도의 부활은 비현실적이고 후진적인 생각일까. 이에 대해 허 교수는 "독거노인이 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발견되고, 간병 문제로 가족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책임 부서인 보건복지부 공무원의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예산이 없다는 말뿐"이라며 "고가 장비로 가득 채운 공공병원을 지을 예산, 한 달 약가가 1000만원이 넘는 신약들을 급여화하는 데 들이는 예산을 독거노인과 간병을 필요로 하는 환자를 파악하고 방문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예산에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윤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