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에서 세터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존재다. 야구가 투수 놀음이라면 배구는 세터 놀음이다. 그의 손에서 배구가 춤춘다. 정규리그 막바지에 이른 2014-2015 프로배구에서도 숨은 승부사는 바로 세터다. 외국인 선수의 강타가 우선 박수를 받지만 승부의 절반은 이미 세터의 손끝에서 결정된다. 열렬 배구팬들은 이미 배구의 이 같은 속성을 꿰뚫고 있다.
#세터에 울고 운 올 시즌 프로배구
화려한 공격수 뒤에는 반드시 유능한 세터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유능한 세터 없이 화려한 공격수는 존재할 수 없다. 2일 현재 프로배구 포스트시즌 진출을 사실상 확정지은 남녀 6개 팀은 모두 안정된 세터를 보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자부 1∼3위 팀인 삼성화재의 유광우, OK저축은행 이민규, 한국전력 권준형이 그들이다. 여자팀은 도로공사 이효희, 현대건설 염혜선, IBK기업은행 김사니가 각각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이들이 세터 부문 상위권을 독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반면 ‘봄 배구’ 티켓 다툼에서 밀려난 팀은 내로라하는 공격수들을 보유했음에도 불구, 세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삼성화재와 더불어 포스트시즌 단골팀이던 현대캐피탈, 대한항공은 두 팀 모두 이번 시즌 세터 부재에 시달리며 4위 이하로 밀려났다. 현대캐피탈은 최태웅, 권영민 등 노장 세터들의 부상공백을 신인 세터 이승원으로 메우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결과는 프로배구 10년 만에 처음 포스트시즌 탈락이라는 수모로 돌아왔다. 대한항공도 토종 거포 김학민이 시즌 중 제대 복귀했음에도 주전세터인 한선수의 입대로 인한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봄 배구’에 초대받지 못했다.
전무후무한 8년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삼성화재는 유광우가 보배다. 삼성화재는 용병들의 힘으로 우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잠재력을 코트에서 최대한 살려낸 이는 다름 아닌 유광우다. 가빈(캐나다)과 레오(쿠바)는 삼성화재에 입단하면서 ‘공격에만 특화된 선수’로 거듭났다. 사실 삼성화재는 리시브가 좋지 않은 팀이다. 리시브가 7개 구단 중 꼴찌이고, 리시브와 디그를 종합한 수비력에서도 역시 7위에 머물고 있다. 리시브 성공률은 리시브가 세터 반경 1m 안으로 와야 성공률로 잡힌다. 삼성화재는 한 세트당 10개 미만의 리시브만 세터에게 정확하게 배달되기 때문에 유광우는 늘 세트플레이에 애를 먹는다. 하지만 잘못 리시브된 볼을 공격수가 때리기 좋게 토스해주는 능력은 유광우가 최고다. 리시브가 좋아야 공격이 잘된다는 상식을 유광우가 깨버렸다.
OK저축은행 이민규는 프로 2년차이지만 국가대표 세터다. 지난해 각종 국제대회에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세터로 활약한 바 있다. 그는 세터로는 큰 191㎝의 신장에 빠른 토스를 겸비, 현대 배구가 요구하는 ‘스피드 배구’에 적합한 토스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천아시안게임 출전으로 시즌 초반에는 시몬(쿠바) 등 팀내 공격수와 호흡이 맞지 않아 고전했지만 2라운드 들어 곧바로 페이스를 되찾고 팀 창단 2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을 선물로 받았다.
한국전력 권준형은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LIG손해보험 소속이었다. 시즌 뒤 팀 재건에 나선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은 세터 양준식을 LIG손해보험에 내주고 권준형을 받았다. 현역 시절 명세터였던 신 감독의 집중 지도로 권준형은 정상급 세터로 거듭났다. 신 감독은 지금도 팀 훈련 때 세터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시범을 보이곤 한다. 권준형은 “감독님의 토스를 그대로 흉내 내려고 노력한다”면서 “‘세터는 엄마와 같아서 공격수를 위해 최선의 토스를 해야 한다’는 감독님 말씀을 항상 새기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번 시즌 중반 신 감독은 공격수 서재덕을 현대캐피탈에 주고, 권영민을 데려오는 임대계약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만큼 세터로 고민했다는 증거다.
여자부의 도로공사는 10년 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눈앞에 뒀다. 지난 시즌 4위에 그쳤던 도로공사가선두로 급부상한데는 서남원 감독의 팀 리빌딩에 힘입은 바 크다. 그 핵심에 지난 시즌 IBK기업은행 정규리그 우승의 주역 이효희 세터가 있었다. 세터가 안정되면서 도로공사는 니콜의 오픈 및 후위공격과 문정원을 활용한 변칙 공격으로 선두를 지킬 수 있었다.
현대건설도 염혜선의 안정된 볼 배급을 바탕으로 지난 시즌 5위에서 2위로 도약할 수 있었다. 삼성화재와 마찬가지로 여자부 리시브 꼴찌팀인 현대건설이 공격성공률 1위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염혜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효희를 떠나보낸 IBK기업은행은 국가대표 출신 김사니를 영입해 신흥강호의 지위를 지켰다. IBK기업은행이 속공과 시간차 공격 1위에 오른 데는 김사니의 절묘한 토스워크에 힘입은 바 크다.
#신인 세터들의 대거 등장
이번 시즌만큼 신인 세터들이 대거 주전으로 등장한 해도 드물었다. 주전세터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경험과 노련미가 필요하지만 일부 팀은 이를 생략한 채 신인 세터에게 팀의 운명을 맡겼다. 첫 시즌의 도전은 실패였다. 하지만 내년 시즌 이후 경험으로 무장한 신인 세터들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남자부 4개 팀이 이례적으로 세터를 1순위로 뽑았다. 공격수나 리베로를 1순위로 뽑던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1순위로 뽑혔던 이들이 수개월 뒤 주전으로 활약할 지는 아무도 몰랐다.
최태웅, 권영민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배 세터를 제치고 거의 전 경기에 기용된 현대캐피탈 이승원은 한양대 시절 대학 최고의 세터로 이름을 떨쳤던 선수였다. 세터 출신 김호철 감독의 개인지도와 선배들의 과외수업으로 일취월장한 이승원은 세터부문 5위로 랭크돼 신인 세터 중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비록 팀은 포스트시즌 진출이 사실상 좌절된 상황이지만 그는 경험이란 값비싼 자산을 얻게 됐다.
대한항공은 신인 세터 황승빈을 주로 기용하며 시즌을 치렀다. 지난 시즌 한선수의 입대로 무려 5명의 세터를 번갈아 쓰며 고전했던 김종민 감독은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로 뽑은 황승빈을 선발 세터로 투입했다.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신예 세터의 활약에 V리그는 더욱 풍성해졌다. 매년 세터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LIG손해보험도 191㎝의 장신 세터 노재욱의 등장에 반색했다. 세터 가운데 1순위로 입단한 노재욱은 지난해 12월 21일 LIG손해보험이 현대캐피탈과의 천안원정경기에서 10년간 당했던 26전전패의 수모를 끊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여자부는 현대건설 이다영이 19경기에 교체 출전하며 경험을 넓혔다. 쌍둥이 언니 이재영(흥국생명)과 함께 이번 시즌 최고의 신인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팀 선배 염혜선의 백업 세터로 출전하며 기량을 닦았다.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배구판 쥐락펴락 ‘마법의 손’ 코트의 지휘자 세터… 이번 시즌엔 누가 누가 잘했나
입력 2015-03-03 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