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중간선거를 치른 미국 정치권의 관심이 서서히 대통령 선출이 낀 2016년 선거일정으로 옮겨가고 있다. 2016년에는 대통령과 하원의원 전부, 상원의원 3분의 1을 새로 선출하게 된다.
지난해 중간선거 패배의 ‘설욕’을 벼르는 민주당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상은 유명 정치인이나 공화당이 아니라 한 기업가 형제일지 모른다. 미 언론은 지난 1월 26일 공화당의 돈줄인 석유재벌 찰스 코크(79)와 데이비드 코크(74) 형제가 조직한 정치네트워크가 2016년 선거 기간에 약 9억 달러(약 9897억원)를 풀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대통령 선거를 돕는 외부조직에 의한 지출로선 역사상 가장 큰 비용이다. 이 막대한 자금에는 다른 300명 부자들의 기부금이 포함되지만 최대 몫은 역시 코크 형제의 돈이다. 이 형제는 2012년 대선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퇴진시키려고 4억 달러(약 4399억원)를 뿌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뉴스에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 민주당은 발칵 뒤집혔다. 코크 형제가 발표한 금액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유력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진영이 구상 중인 선거모금액의 몇 배가 되는 액수이기 때문이다. 공화당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12년 밋 롬니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대선과 그해 상·하원 선거를 통틀어 당시 공화당은 6억5700만 달러(약 7225억원)를 지출했다. 이제 한 개인이 조직한 사적인 네트워크가 공화당 전체 모금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선거에 투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코크 형제 신드롬(현상)’은 소수 억만장자에 휘둘리는 미국 정치의 상징어가 되고 있다.
◇코크 형제는 누구?=찰스와 데이비드 코크 형제는 ‘코크 인더스트리’의 소유주로 지난해 3월 경제잡지 포브스의 ‘세계 부호 순위’에서 각각 400억 달러의 자산으로 공동 6위에 올랐다. ‘코크 인더스트리’는 석유채굴과 정유·화학, 4000마일에 이르는 송유관이 주 사업영역으로 돼 있다. 하지만 미 잡지 롤링스톤스는 “코크 인더스트리는 단순한 석유기업이라기보다 화석연료를 사용 가능한 재화로 변형시키는 산업의 모든 단계에 관련된 기업”이라고 소개했다.
코크 인더스트리는 규모로 따져 미국 내 비상장기업 중 2위로, 연간 수익 1150억 달러, 종업원 수 14만명에 이른다. 이들 형제의 석유화학 사업은 석유분해법(cracking) 발견에 한몫을 담당한 부친 프레드 코크에 이어 2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이들 형제의 철학은 자유지상주의(리버테리언·libertarian)에 가깝다. 이들은 정부의 규제와 세금을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저해하는 ‘악(evil)’으로 본다. 특히 석유채굴과 화석연료를 정제하는 화학업에 종사해서인지 이들 형제는 각종 환경 규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왔다. 미 환경보호청(EPA)의 최대 라이벌이 코크 형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문제는 이들 형제가 천문학적인 자금으로 현실 정치와 국가정책에서 자신의 이념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당초 작은정부와 세금 감축을 정강으로 한 리버테리언 정당이 공화와 민주당에 이어 제3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동생 데이비드는 1980년 리버테리언 정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미국에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자 공화당에 대한 전폭적 지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공화당이 코크 형제의 천문학적인 자금 지원 계획에 기뻐할 수만 없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렇게 되면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한 후보들도 공화당 지도부의 결정보다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코크 형제의 방침과 노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 선임보좌관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이미 코크 형제는 정당을 뛰어넘었다”고 말했다. 1조원에 가까운 선거 자금을 풀겠다는 것은 공화당에 대한 ‘지원’ 정도가 아니라 공화당 후보자들을 ‘매수’하려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미국 정치를 지탱해 온 양당 시스템이 ‘허상’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과장이라고만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코크 형제는 금권정치로 기울어가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읽힌다.
코크 형제가 미국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반영한 신조어도 나왔다. 코크토퍼스(Kochtopus)는 ‘코크(Koch)’와 문어를 의미하는 ‘옥토퍼스(octopus)’를 합성한 단어로 언론, 의회·법조계, 학계, 싱크탱크 등에 문어발식으로 보수적 이념을 전파하는 이들 형제의 활동을 지칭한다.
미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UC버클리 로버트 라이히 교수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코크 형제가 미 하위 40% 전체 미국인들의 자산을 합친 것보다 많은 부를 가졌다고 비난받아선 안 된다. 미국은 자유로운 땅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천문학적인 부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관에 맞도록 법과 규칙을 변경하려는 것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면서 “미국이 아직은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제(oligarchy)가 아니지만 코크 형제를 비롯한 일부 억만장자들이 미국을 끌고 가려는 곳은 바로 과두정치체제”라고 우려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
[월드 이슈] “형, 코끼리 한번 길들여볼까?”… 美 대선 ‘코크토퍼스의 손’
입력 2015-03-03 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