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기자실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경련회관 44층에 있다. 높은 곳에 위치한 기자실은 전망이 좋다. 여의도공원과 한강이 한눈에 펼쳐지고, 날씨가 맑을 때는 서울월드컵경기장 너머 인천까지 내다보인다. 전경련을 출입하게 되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얘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자실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높이만은 아닐 것이다. 전경련이 경제5단체(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경영자총협회) 중 가장 위상이 높다는 자부심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전경련을 출입했었다. 당시 전경련의 위상은 엄청났다. 회장단 회의가 있는 날이면 기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재계 총수들에게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줄을 섰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국내 굴지 기업 총수들의 말 한마디에 경제계는 물론, 정계도 귀를 쫑긋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묵직했고 영향력이 있었다.
무척 오랜만에 다시 전경련을 맡게 된 후 그 달라진 위상에 놀라게 됐다. 전경련 회장단은 우리나라 30대 그룹 재벌 총수들인데 요즘은 회장단 회의를 열기도 어렵다. 이건희 회장은 입원 중이고 최태원 SK 회장은 수감 중, 김승연 한화 회장은 집행유예 상태다. 강덕수 전 STX·현재현 동양 회장은 비리로 물러났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김준기 동부 회장 등은 전경련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그러니 수장인 허창수 GS그룹 회장도 힘이 빠진다. 전경련을 이끌고 나갈 동력이 없는 것이다.
회의를 해봤자 별 내용이 없으니 지난해부터는 회장단 회의 결과조차 발표하지 않고 있다. 90년대 회의실 앞이 기자들로 북적이던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재벌회장의 횡령이나 ‘땅콩 회항’ 사건 등 재계의 긴급 현안이 발생해도 전경련은 남의 일인 듯 수수방관했다. 불명예스러운 일을 저지른 회원사들을 비판하거나 퇴출시키는 등의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규제개혁, 법인세, 창조경제 지원, 기업가 정신 회복 등 굵직굵직한 현안이 있지만 이 역시 전경련 회장단에서 심도 있는 토론이 이뤄졌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위상이 추락하다보니 전경련 회장을 선뜻 맡겠다는 사람도 없다. 박용만 두산 회장을 수장으로 한 대한상의에 재계 주요 인사들이 모이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풍경이다. 심지어 ‘전경련 회장의 징크스’라는 말까지 나온다.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룹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대우그룹은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 수행 도중 워크아웃됐고, 손길승 전 SK 회장은 취임 9개월 만에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도중하차했다. 조석래 효성 회장은 퇴임 후 검찰조사를 받았다.
전경련이 올해 창립 54주년을 맞았다. 과거 전경련은 한국 경제계의 맏형으로서 경제성장은 물론 88올림픽 유치, 1997외환위기 극복을 주도했었다. 하지만 2015년의 전경련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 경제단체의 대표 자리도 대한상의에 넘겨준 상황이다.
최근 허창수 회장이 3연임을 결정하고 새 임기를 시작했다. 전경련은 이제라도 허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며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재계 이익단체에 머문다면 더 이상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전경련이 ‘한국경제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냉정한 평가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한승주 산업부 차장 sjhan@kmib.co.kr
[뉴스룸에서-한승주] 전경련의 위기
입력 2015-03-02 03:14 수정 2015-03-02 19:19